에린 음악의 역사 (4)(The History of Erinn Music (4))

    마법 음악의 대두는 에린의 음악계를 크게 고전주의파와 실용주의파로 나누는 결과를 낳았다. 고전주의파는 화성법에 기초하여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곡된 음악만을 인정하는 학파이며, 실용주의파는 작곡 기반이 어디에 있든, 음률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음악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학파였다. 마법 음악은 엄밀히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의 음악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법 음악에서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 선율이나 깊은 뜻이 담긴 가사, 그리고 그것의 조화로서 만들어지는 운율이 아니다. 마나를 짜 넣고, 그것을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음계와 가사가 필요할 뿐이다. 때문에, 그것은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할 때 마나의 발현을 돕기 위해 중얼거리는 마법어와 그 범주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음악이 원래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마법 음악은 음악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뿌리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고전주의파는 실용성을 중시한 나머지 음악의 표현이라는 면을 고려하지 않는 마법 음악을 음악으로 인정하지 않고, 모험가들이라는 독특한 집단에 의해 탄생한 사생아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해 실용주의파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아무리 실용성을 우선시하는 음악이라고 해도, 마법 음악 역시 음소와 음률에 대한 해박한 이해 없이는 작곡이나 연주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 음악에서도 기본적인 음악으로서의 형태가 파괴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음악을 만드는 개개인의 역량에 많은 부분을 돌리는 논리일 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은 아니었다. 결국, 투아하 데 다난에 의해 꽃핀 에린 음악의 주류는 고전주의파 쪽으로 그 무게가 실리게 되었고, 오늘날 음악에 대해 실용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이단시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청중의 규모가 커지고 예술성을 추구함에 따라 취주악에서 관현악으로 발전해온 음악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교향악의 대두. 교향악은 국왕이 집권하는 왕제가 발달하고 귀족주의가 심화됨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꽃을 피우게 된 형식이다. 교향악의 발전으로, 음악은 조금 더 웅장하고 서사적이면서도 서정적 예술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지휘자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악기를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오십명이 넘는 대규모의 연주자들을 지휘하는 일은 군대를 편제하고 지휘하는 일만큼이나 뛰어난 지도력과 더불어 섬세한 예술성을 요구했다. 때문에, 이것저것 악기를 다루던 연주자들은 보다 전문적으로 악기 연주에 몰두하게 되었으며, 작곡이나 지휘 역시 연구를 거듭한 전문 분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들은 음유시인과는 달리 음악가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현대 에린 음악의 중추는 그들이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에린의 음악은 희노애락의 표현을 위한 단순한 리듬으로부터 시작해, 마을간의 소식을 전하는 음유시인을 거쳐, 보다 전문적인 음악인을 필요로하는 거대한 예술작품에 이르게 되었다. 전문적인 음악가를 배출하기 위한 노력은 현재 울라 대륙에서 수립된 최초의 음악 아카데미로 그 꽃을 피웠고, 그 역사는 지금까지 흘러온 대로 앞으로도 계속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