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나는 음악을 작곡하면서 에린에 거주한 우리 선조들의 다양한 유적과 그간 진행해 온 음악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에린의 음악사를 총정리해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에린 음악의 역사라는 졸고를 낸 적이 있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어서 한편으로는 에린에서 음악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잘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격려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책이 너무 어렵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도 상당히 많았다.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어렵게 만들어진 책은 오히려 음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거리감을 느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내 제자들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을 거듭했고, 그 결과 앞서 낸 책의 내용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쓴 참고서적을 한 권 더 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렇게 만들어진 본서는 음악가들의 성향과 업적을 통해 에린 음악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책으로, 음악의 역사를 세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시 정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선배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내가 범한 실수로 온전히 전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나를 다급하게 만들었고, 그 다급함에서 오히려 이전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이 책이 에린에 퍼진 음악의 세계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또 한 권의 졸저를 이 세상에 내보낸다.
부디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선배 음유시인들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이 책을 집필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책의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신경을 써 준 나의 사랑하는 제자 네일군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음악의 신, 코르플레
에린의 음악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코르플레다.
그의 이전에도 음유시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파르홀론 족이 에린에 번성했던 그 시기는 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하는 수준이었다. 음악의 서사성은 그다지 높지 않았고, 제한적이었으며, 또한 연주하는 사람마다 같은 이야기를 함에도 차이가 있었다. 코르플레는 이런 음악의 흐름을 일거에 바꾸어버린 인물이다.
모이투라 전쟁을 전후해 그동안 전해져오던 음악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그는 뛰어난 작곡가이자 시인이었고, 연주자이기도 했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악보 스크롤의 형태는 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의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안목은 이후 음유시인들의 노래가 혼탁한 세상을 비판하는 용기를 가지고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곡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공통적인 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의 목소리는 무게있되 눌리지 않은 저음으로 이 세계의 역사를 노래했다. 그의 연주는 악보를 넘어 사람들의 영혼에 호소했고, 그가 부르거나 만든 노래는 많은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투아하 데 다난들 사이에서 마비노기로서 사랑받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음악의 신으로도 일컬어지고 있다.
그가 음악의 신으로 존경받는 것은 그의 음악성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물론 그의 음악가로서의 능력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지만, 그의 위대한 점은 음악을 음악의 영역에 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통한 사람들 사이의 이해와 소통을 도모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 마족과 내통한 폭군 브레스에게 저항하였듯이 불의를 바로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조리한 권력에 대항한 그의 생애는 많은 음유시인들의 귀감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코르플레가 이후의 음악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이어서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은 이후 곡의 완성도와 형식미를 추구하는 일단의 음악가들의 모범이 되었고, 더불어 그의 강직함은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코르플레 이후 악보가 보편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음악에 한결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업적을 바탕으로 에린에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등장했고, 각자 자신의 음악을 마음껏 뽐내었다. 하지만 코르플레의 업적은 너무나도 큰 것이어서, 이후의 음악가들의 활약을 그와 비교한다면 정작 전체가 이룬 진보에 비해 개개인의 진보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몇몇 연주자들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악의 대가, 아브칸
인간과 포워르와의 길고도 고통스러웠던, 하지만 결국 장엄한 승리를 쟁취해냈던 모이투라 전쟁은 당시의 음유시인들이 즐겨 다룬 주제였다.
자연히 같은 이야기를 다룬 곡을 부르는 데에 따라 청중들 사이에서는 같은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들끼리의 비교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것은 음유시인 개개인의 개성보다는 곡을 향유하는 이들의 기호가 연주와 창작 활동에 더 크게 고려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은 바로 아브칸.
아브칸은 현악의 대가로 불리는 인물로 그가 연주하는 류트나 하프 소리의 아름다움은 천상의 것에 비교될 만큼 아름다웠고,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매혹적이어서 많은 여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때로는 슬프게, 그리고 때로는 그가 연주하는 악기와 어울려 환희를 전달하는 그의 목소리를 급기야는 요정이 듣고 감동해 요정들의 나라로 아브칸을 데려가고 싶어했다는 전설도 있을 정도다.
그가 즐겨 부르곤 했다는 과거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노래는 오늘날 다수 전해져 오고 있긴 하지만 정작 그가 이 세계에 남긴 감동만은 아직 전해져오지 않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슬픔으로 남는다.
아브칸의 음악은 많은 음악가들에게 악기와 발성에서의 기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후일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해야 하는 근거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언어의 연금술사, 엔
아브칸이 소리의 아름다움을 빚어내는데 전력을 다한 음악가였다면, 아브칸과는 반대되는 길에서 음악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엔.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언어의 연금술사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런 호칭을 얻게 된 계기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음악의 풍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음악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일어난 또 다른 현상 중의 하나는 그동안 파르홀론과 그 이전의 민족들이 애창헀던 노래나 음악을 악보에 채록하는 것이었다.
비록 음유시인들에 의해 구전되어 왔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구전에는 한계가 있었고, 과거의 이야기와 역사를 아는 이들이 음악의 길을 걷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들 음악가가 아니었던 음악가들은 채록을 통한 과거 유산의 계승에 큰 활약을 펼쳤다.
바로 여기서 엔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전승가이자 역사가였고, 이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데 평생의 노력을 바친 사람이다. 그의 노랫말은 언어적으로 음률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수고를 큰 폭으로 덜어주면서도 의미를 빈틈없이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그의 노래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다른 음악가들의 노래보다 훨씬 밀도가 높으면서도 명료해서 그의 노래를 듣는 것은 음악을 통한 지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드루이드 지망생이나 학문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유행이 되기도 했었다.
그는 원래 드루이드가 되고자 했었던 자로, 드루이드로 수련하던 도중에 함께 공부하던 음악의 위대함을 깨닫고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과거의 이야기와 역사, 마법 등에 대해 드루이드로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에린의 음악에 드루이드적인 감각을 불어넣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만든 음악은 곡 자체로는 그다지 감흥이 없지만, 그의 잘 다듬어진 가사는 그의 노래의 품격을 한층 더 높였고, 일부 음악학자들은 그가 멜로디보다는 가사에 집착했다는 면을 들어 사실 음악 자체에는 진보를 가져오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가 오늘날 중요한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서 널리 기억되는 것은 그의 음악에 대한 태도와 전문성이 이후 취주악이나 관현악의 등장에서 각각의 음악가들이 가져야 하는 태도를 설명하는데 자주 이용되고 있기 때문.
다만 그가 음악에 마법적인 효과를 넣으려고 했고, 그를 통해 음악을 마법의 영역으로 끌어오고자 했던 것은 고전주의파 음악가들에게서 아직까지도 큰 비난을 받고 있다.
세 음악가가 보여주는 것.
아브칸과 엔을 통해 음악이 사람의 정서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면서 음악 자체를 감상이나 향유의 대상이 아닌,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저급한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음악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모이투라 전쟁 당시부터로 그 기원을 거슬러갈 수 있는데, 당시 많은 음유시인과 드루이드들은 음악을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한 바 있다. 하지만 음악을 무기로 활용하거나, 지금도 대부분의 음악가들에게서 금기시되고 있는 마법의 힘을 음악에 부여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음악을 통해 전쟁에 나선 전사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뜻으로, 음악의 연주를 통해 사람들의 전의를 불태우고, 두려움을 잊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 결과였을 뿐, 마력이 깃든 멜로디로 사람을 현혹시킨 것이 아니었다.
저 음악의 신 코르플레의 위대함이 현재까지도 빛을 잃지 않고 찬란하게 유지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비록 음악이 실용적인 면에 초점을 맞췄을지언정, 그가 연주하고 전파한 음악은 순수한 형태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음악에 마법적인 효과를 깃들게 하는 것. 엔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음악은 드루이드에 의해서도 전해졌다. 일부 드루이드가 음악을 마법적인 수단으로서 활용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피할 수 없는 귀결일지도 모른다. 특히, 저 사악한 마법사 자브키엘은 이런 마법 음악의 사용에 능통했다고 한다.
반면, 그의 야망을 분쇄한 저 위대한 대마법사 마우러스는 드루이드가 음악에 심취하는 것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질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음악 자체를 마법의 한 가지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표현의 수단인 음악을 마법에 부속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며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현재는 사람의 정서를 감동시키는 음악으로서의 가치 역시 흔들리고 있는 시대.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이전의 선배 음악가들이 걸은 길을 통해 음악에 대한 태도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브칸과 엔의 예를 들어 우리의 음악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후대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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