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내게 말씀 하셨다.
"몸에 털 난 것들은 거두는 거 아니야."
난 우유부단하고 모질지 못해서 항상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상심해 몇 일이고 우울하곤 했고 그런 내 모습이 당신은 분통터지셨나 보다. 결국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홀로 해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당신 자식에게 두고두고 일러두고 싶으셨던 거겠지.
"냐아아~"
보드랍고 윤이 나는 청회색의 온기가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내 무릎 위에 느껴진다.
녀석이다. 녀석은 갸르릉 거리며 내게 애교를 부린다.
어머니, 어쩌겠어요. 이렇게 귀여운 걸요.
나는 한 숨을 쉬며 녀석을 내 두 손으로 잡아 올린다.
바둥바둥 거리는 작은 녀석의 가슴에서 팔딱이는 고동소리가 전해진다.
녀석이 말을 할 줄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주인님 놔주세요. 아니면 야, 이거 안 놔?
...알 수 없는 일이다.
녀석을 만난 것은 이멘 마하의 구석진 골목길 이었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외로운 도시 이멘 마하.
사지 멀쩡하나 속은 부실한 나와 닮아서 어쩐지 아련한 동질감에 자주 찾는 곳이었다.
할 일 없이 이곳 저곳을 걷다가 지치면 전망대에 들러 낚싯대를 사서 아무 곳에나 낚싯줄을 던지곤 했다.
걸려 올라오는 것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지만 하늘에 흐르는 구름을 보는 일이나 수면 위에 새겨진 은 비늘을 헤아리는 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나란 인간이 원래 재미없는 인간이라서 그런가?
여튼 루아의 집 앞을 지나는데 왠 덩어리 하나가 눈에 걸렸다.
세상만사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 덩어리를 무시한 채 지나가려는데 덩어리가 나를 불렀다.
"냐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 세계에서 나를 불러줄 존재가 없었기에 나는 그 진심 어린 부름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몸을 굽혀 그것을 살펴보니 깡마른 진 회색 가죽덩어리가 힘없이 울고 있었다.
녀석은 인기척을 느끼자 힘겹게 눈을 떠서 나를 보았다.
아주 작은 두 개의 페리도트가 초연이 반짝였다.
작고,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지만."
나는 가방 한 구석에 엉망으로 구겨져 있던 저가형 옷감을 꺼내어 녀석을 감쌌다.
기운이 없는 건지 나를 믿는 건지 녀석은 편안한 표정으로 추욱 늘어져 이내 잠이 들었다.
나는 흙이며 온갖 먼지가 말라붙어서 볼품없는 녀석을 데리고 로흐 리오스로 갔다.
간만에 카레라이스로 점심을 먹어볼까 싶기도 했고 그곳에 가면 녀석을 씻길 물이야 지천에 널렸으니까.
웨이트리스 셰나는 매우 까다로운 성미로 이 녀석을 보면 세 시간쯤은 조잘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옷감으로 녀석을 숨막히도록 감싼 후 주문도 하지 않고 물가로 냅다 뛰었다.
"유릴씨, 고양이는 물을 싫어한다고요. 에, 그것도 몰라요?"
셰나의 핀잔. 나는 그냥 하하 하고 웃는다.
하여간 저 눈치 하고는... 어느새 알아차렸지?
"줘 봐요. 내가 씻길게요."
셰나는 뺏다시피 녀석을 가져가서는 옷감을 물에 적셔서 꼭 짜준 후에 녀석을 닦았다.
그 손길이 우악스러워 보이면서도 정감 있어서 나는 그 광경이 참 보기 좋았다.
녀석도 나보단 귀여운 세냐양이 좋은지 잠자코 있었다.
"다됐다. 호오, 제법 유서 깊은 가문의 아가씨 인걸요? 러시안 블루라는 종이네요. 유릴씨랑 안 어울리게 귀여운 걸요? 넌 절대 주인 닮으면 안 돼~"
"뭐라고요?"
"호호. 아니예요. 자 그럼 이제 주문 하셔야죠?"
사람들은 셰나의 저 능청스러움과 왕 내숭이 매력이라고 했지만 난 정말 싫다. 본인 앞에서 저렇게 면박을 주다니.
그나저나 말끔해진 녀석은 잘 말린 나무 향이 나는 바닥에 엎드려 몸을 말리고 있었다.
씻겨놓고 보니 녀석에게서도 기품이 느껴진다. 좋은 말로 기품이고 내 식대로 말하면 돈 좀 있는 집안자식 이랄까.
로흐 리오스는 한산했다. 하지만 저쪽 테이블에서 한 커플이 늦은 점심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문득 시장기를 느껴 셰나에게 손짓을 했다.
"여어, 카레라이스 하나 줘."
"니야아..."
어느 새 내 옆으로 다가 온 녀석은 뇌쇄적인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그 복실한 앞발로 내 발을 툭툭 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나 지금 배가 고픈데 저기서 향기로운 은 붕어 스튜 냄새가 나는데 우리 함께 그 맛에 대해서 심도깊은 대화를 나누면 안 될까?' 라고 하는 듯 했다. 이거, 못 말리겠군.
나는 조심스레 녀석을 안아올려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셰나. 카레말고 은붕어 스튜! 그리고 접시 하나만 더 가져다 줘."
"예에~ 알겠어요."
나는 빈 접시에 은붕어 몇 마리를 덜어내서 그것을 몇 번 후후 분 다음 녀석에게 주었다.
꽤나 오랫동안 먹은 게 없었던지 녀석은 삐쩍 말라 있었지만 혈통 있는 집 고양이라고 우기고 싶었던지 매우 우아한 자세로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해서 나는 녀석을 쓰다듬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지만 녀석은 고양이이니 괜찮으려니.
나는 아주 오랜만에 느긋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 항상 나에게 있어 식사란 허전해진 위장을 채우는 일 이상의 의미가 없었으니.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갸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를 보고 눈웃음 지었다.
허기가 지고 지쳤을 뿐이었는지 녀석은 우아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나는 녀석과 함께 말없이 광장까지 걸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날 일은 아마도 없다.
"이제 네 갈 길을 가 봐. 그래도 즐거웠다."
나는 녀석의 부드러운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이제 무엇을 할지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같이 가."
내 귓가에 들리는 가녀린 여자의 목소리.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내 뒤에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녀석만이 있었다.
내가 좀 피곤해서 환청을 들은 건가?
녀석은 앞발을 내밀어 뭔가 반짝이는 것을 내게 주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금화였다.
나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듯이 조심스레 내 쪽으로 밀어 낸 금화 몇 개.
그리고 서운한 표정으로 뒤돌아서는 깜찍한 연기에 나는 그만 눈가가 시려와서 와락 하고 녀석을 안아 올렸다.
아직 어린지 조그마한 몸집의 부드러운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안겼다.
내가 생각이 잠겨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 게 불만이었는지 녀석은 그 솜방망이 같은 발로 바둥바둥 거리며 내 얼굴을 팡팡 쳐댔다.
힘이 실려있진 않은 애교스러운 몸짓이라 간지러웠다.
"알았어. 놀아줄게."
"니야~"
녀석은 귀를 쫑긋 세우며 요염한 자세로 내 앞에 앉았다.
고양이라는 족속들은 분명 모두가 전생에 무희였거나 왕의 여자 쯤 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또 녀석의 애교에 못 이겨 손가락으로 녀석의 배를 간지럽혔다.
갸르릉대며 즐거워하는 녀석을 보니 마음이 묘하게 편안해졌다.
내 안위만 생각하고 살아온 에린의 생활에서 지키고 보살펴야 하는 것이 생겨 조금은 귀찮고 불편했지만 굳어진 마음이 조금은 말랑말랑 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단 한 존재.
그저 나와 통하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 수는 없지만 누구보다도 따스한 눈빛을 가진 나의 작은 동행.
"이름을 지어줄게."
녀석은 눈꼬리를 올리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뭔가 기대한 표정으로 반짝이는 두 개의 페리도트가 여전히 아름다웠다.
"신일."
녀석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내 팔에 얼굴을 부볐다.
"너를 만난 이후로 난 조금쯤은 새롭게 살고 있으니까. 새로운 날들이니까."
"이름, 고마워."
또렷하고 나직한 여자의 목소리.
분명 이 곳에는 나와 신일 뿐인데 들려오는 이 여자의 목소리는 뭘까.
...요즘 들어 환청이 잦군.
신일은 나를 보며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기분으로 망연자실하게.
그때 시야의 끝쯤에서부터 한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속이 다 비칠듯한 회백색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칼의 여자.
가는 발목에 아슬하게 매달린 약간 굽이 있는 구두에선 또각또각 하는 선명한 소리가 났다.
그녀는 말 없이 내게로 걸어왔고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왠지 반가운 기분이 들었고 약간은 무섭기도 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작고 빨간 입술로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순간 내 몸은 굳어진 듯 했고 그녀는 내게서 다시금 멀어지는데 나는 움직일 수가 없어서 안타깝게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가지마!"
나는 탄성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었다.
내 품에는 작은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든 신일이 있었다.
우습게도 내 팔 하나보다 작은 그 고양이를 보면서 그녀의 환영이 겹치는 것을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께 가 뜨거웠다.
내가 왠지 감성적으로 변한 것만 같아서 나는 다시 신일을 내려다보았다.
고르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녀석의 작은 몸이 정겨웠다.
오늘은 신일과 함께 센 마이평원으로 나왔다.
매우 희귀해 비싼 값에 팔리는 흰 그리즐리 베어의 가죽을 구하기 위해서.
광장에서 꽃을 파는 델 이 내게 그 하얀 곰의 소식을 알려주었고 나는 약간의 준비 후 신일과 함께 센 마이로 왔다.
새큼한 풀 냄새와 따스한 미풍.
곧 이웨카가 뜰 시간이라 주위는 점점 붉게 타 들어갔고 내 발 아래 엎드린 신일은 매우 지루해 보였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흰 그리즐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으슬한 한기에 캠프 파이어를 켜두고 가져온 우유를 데워 신일과 나누어 마시고 보니 졸음이 밀려왔다.
"크워억!"
나는 곰이 울부짖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미 흰 그리즐리 베어는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고 내겐 검을 잡을 시간조차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는 경계자세로 내 앞을 가로막은 신일을 보았다.
"이리와! 도망가. 제발..."
신일은 내 말을 듣지 않았고 그리즐리의 거대한 앞발이 내 얼굴로 닥쳐 들고 있었다.
그때 신일이 그리즐리를 향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 순간 나는 품속의 단검을 꺼내 그리즐리의 눈을 찔렀다.
하지만 이미 나의 유일한 동행은 단말마 비명도 없이 초원 위에 누워있었다.
나는 사력을 다해 그리즐리의 왼쪽가슴에 칼을 박아 넣었고 운 좋게 그것이 관통했는지 그 흰 곰은 절규와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시퍼런 풀위로 몸을 뉘였다.
"신일아..."
녀석은 온통 검붉게 물든 몸으로 소리없이 떨고 있었다.
따뜻했던 녀석의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여신의 날개를 써 이멘 마하에 당도했지만 아그네스는 신일을 보며 고개를 가로 저을 뿐 이미 반쯤은 여신에 품에 안겨버린 녀석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도 신일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그 에메랄드 빛 눈으로 나를 보고 또는 미소 지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를 안심 시키려는 그 눈물겨운 연기실력에 난 크게 소리 내어 웃었지만 눈은 이미 내 통제를 벗어나 눈물이 흘러내렸다.
신일은 작은 앞발을 뻗어 내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이내 힘없이 발을 떨구었다.
어머니, 어머니 말씀에 맞는 것 같아요.
비록 털이 난 짐승이 나를 배신하고 화나게 하지 않아도 나를 아프게 할 수 있고, 나를 떠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비록 작은 고양이 한 마리 였지만 나에게 커다란 것을 주고 갔네요.
나는 신일이 나를 위해 주고 간, 직접 따온 - 이제는 바짝 말라 드라이플라워가 된 - 꽃송이나 쪼글쪼글하게 시들어 버린 사과.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이 수줍게 건낸 몇 닢의 금화를 보며 한참을 슬퍼해야 했다.
그리고 이멘 마하를 돌아다니다가 도둑고양이라도 보는 날엔 가방 속에 말려놓은 은붕어 한 마리라도 던져주고 가는 그런 버릇도 생겼다.
그날도 나는 작은 도둑고양이에게 빵 부스러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동물을, 좋아하시나 봐요?"
"예. 고양이를 특히 좋아해요."
나는 왠지 익숙한 느낌의 목소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놀랍게도 꿈속의 그녀와 꼭 닮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저도 고양이를 좋아하는데, 같이 산책이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조.. 좋아요."
그녀는 여유롭게 웃으며 내 팔짱을 꼈다.
그 녀석이.. 보내준 사람인 건가? 어쩌면 당분간은 외롭진 않을 것 같다.
이멘 마하의 작은 틈새길.
아삭거리는 소리가 나는 새까만 실크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조용히 벽에 기대 좁은 길의 틈 사이로 보이는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새까만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어 내린 젊은 남자. 그녀는 그를 보며 반가운 듯이 웃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당신을 위해서 내 아홉 개의 삶 중에 두세 개쯤은 없어져도 괜찮을 것 같아."
세가지 색으로 얼룩이 진 새끼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남자에게로 그녀는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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