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이 넓은 에린에서 자라고 있던 한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제 전생이라고 말할 수 있기도 하고, 플루트로 살아가는 것은 제 2 의 인생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네요.
제가 있었던 곳은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데다가 주변엔 사나운 동물들만 다니고 있어 언제나 겁에 질려있었습니다.
간간히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어요.
모두 무기를 들고 소리를 지르며 곰에게 달려들곤 했었지요.
덕분에 저는 대화할 상대도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외로웠어요. 그때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우유빛의 피부빛에 긴 금발머리.
약간은 멍한듯한 눈빛에 로브를 걸치고서 한 손에는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는 내 주위로 왔습니다.
뭐랄까요, 잠에 취한걸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비틀비틀 거리는 사람.
그녀는 칼을 땅에 던져놓고는 잠시 쉬려는 듯 저에게 살며시 기댔습니다.
그리고는 길게 숨을 들이키더니 곧 내쉬었습니다.
잘 느낄 수는 없었지만 연하게 위스키의 냄새가 났습니다.
잠에 취한 게 아니라 술에 취한 거였군요.
그녀는 내 그늘에서 잠시 눕더니 중얼거리며 말했습니다.
"정말 바보같아... 난..."
왜 그렇냐고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역시나 말할 수 없는 나무였기에 그저 묵묵하게 서 있을 뿐 이었습니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저기...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어...?"
나한테 말하는 걸까요?
말 못하는 나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줘봤자 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어요.
궁금하긴 하지만.
"난 말이야..."
어느 샌가 그녀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답 못하는 나무라도 상관 없다는 것 일까요..?
"난.. 음유시인이야... 악보를 보고 음악을 연주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게 내 목적이야... 물론 돈벌이는 안 되는 일이지만.. 난 그 일에 대해서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있고... 또 즐거워..."
저 멀리서 천천히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뜨고는 한 손으로 자신의 눈에 가져다 댄 채로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전 정말 난감해져 버렸습니다.
오랜만에 나에게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건 분명 기쁜 사실이지만,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다가 갑자기 울어버리면 저보고 도대체 어떡하라는 건지요...
"나에게는 소중한 플루트가 있었어... 아주 소중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손수 만들어줬던 플루트가...
그런데... 그런데 그 플루트가 사라져 버렸어... 그 사람과 함께.. 커다란 불길 속으로 들어가버렸어..
내 플루트 연주 소리를 들어주던 그가 없어지니 연주를 해야 할 가치를 못 느껴서...그와 함께 멀리멀리 보내버렸어..."
그녀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 소중한 플루트를 태워 버렸다는 걸까요 ?
전 왠지 그녀가 어리석다고도 생각이 되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이 떠나갔으면 그 사람이 만들어줬던 플루트 역시 소중히 간직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분명 제가 그녀였다면 그 플루트를 더욱 소중히 간직했을꺼에요.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이 깃들어 있을 거니까요 .
"그 플루트를 불길 속에 던져버리고..한참 후에...너무나도 후회해 버렸어... 난 정말 바보야...
어째서 태워버렸을까.. 소중한 플루트인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리고는 음유시인을 관뒀지.. 도저히 악기를 손에 쥘 수 없었어.. 그의 플루트가 아닌 이상은.."
인간은 바보 같은 존재.
한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평생을 후회하게 될 일을 만들고, 그 일을 잊기 위해 혼자 끙끙대죠.
"그런데...., 더 이상은 플루트를 연주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내 몸과 마음은 플루트를 잊지 못했어.. 이멘마하로 가서 새로운 플루트를 샀었지...
그가 묻혔던 장소로 돌아와 애절하게 연주하려 했었지만.. 음색이 달랐어... 그의 플루트와 달리 너무나도 딱딱 했달까 ?
그 사람의 플루트처럼 뭔가 부드럽고 따스한..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어..."
그녀는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눈물을 소매로 스윽 닦고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난 정말 구제불능인 인간이야... 그가 만들어줬던 플루트가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악기를 연주하지 않겠어...플루트를 입에 대지 않을거야..."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이 만들어준 플루트는 분명 이 세상 최고의 플루트보다 음색이 아름답고 투명할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녀에 대한 정성과 사랑으로 만들어진 플루트일테니까요.
처음에 그녀를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게 왠지 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녀의 마음...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직업이 음유시인이었던 만큼 플루트에 관한 애정도 각별 했을 거에요.
물론 그와의 사랑도 중요했었겠지만, 소설가에게는 소설이 중요하듯이 말이에요.
사랑했던 사람이 만들어준 플루트라니 , 음유시인에게는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있었을까요?
기쁜 마음에 더더욱 아름답고 맑은 음으로 연주할 수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그런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버리니 상처가 컸을 겁니다.
그가 만들어줬던 플루트가 자신의 손에 있는 한 그와의 추억이 자꾸 떠오를 꺼구요.
힘들었을꺼에요...많이.
그래서 불 길 속으로 플루트를 던져버린 게 아닐까요...
정신을 차리고 후회해봤자 이미 사라져 버린 건 돌아오게 할 수 없으니...
더 이상 플루트를 연주할 의욕조차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았겠지요.
"잘있어...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웠어..."
그녀는 나를 툭툭 치더니 자신의 칼을 다시 들고서 가버렸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심정이 복잡한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내가 그녀의 플루트가 되면 안될까 .
라는 생각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본 거구요.
전 기다렸습니다.
저를 플루트로 써 줄 사람이 오기를...
몇 년이 지난 후에서야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꽤 인자해 보이는 할아버지였습니다.
"너를 플루트로 쓰고 싶은데... 괜찮겠니...?"
하늘이 제 소원을 들어주는 걸까요
물론 대답을 못했지만 그 할아버지는 제 마음을 알고 있을 거에요.
오랫동안 많은 나무들이 플루트가 되어가는 과정을 책임 지셨을테니까요.
처음으로 베어지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새로운 모습으로 가꾸어졌습니다.
꿈에도 바라던 플루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뭐랄까요.
제가 자란 환경이 좋지 못해서일까요.
다른 플루트보다는 꽤 겉모습이 좋지 못했습니다.
악기 상인들은 저를 받아주려고 하지 않더군요.
슬펐습니다.
제가 빨리 진열되어야만 그녀가 혹시나 나를 찾으러 올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결국은 여러 사람의 손에 걸쳐서 이멘마하로 오게 되었습니다.
상품으로 놓여지긴 했지만 역시나 저를 사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모두 반질반질하고 깨끗한 플루트만을 찾고 있었지요.
상관없었어요.
전 기다렸습니다.
마음속에 많은 상처를 가진 한 음유시인을.
몇 날 몇 일, 몇 년을 기다려도 그녀가 찾아오질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아픔을 딛고 다시 플루트를 불 수 있을 거에요, 꼭.
"...저어, 이 플루트... 불어봐도 될까요?"
한 여성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저를 살며시 들었습니다.
세월이 꽤 흘러서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포근했던 손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녀가 저를 찾아 온 것일까요...
그녀는 살며시 저를 입에 대고 악보대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부드럽게 또는 천천히 , 이 세상에서 처음 들어보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리로요...
'나에게서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나고 있어...'
나 역시도 눈물을 흘릴 만큼 너무나도 기뻤어요.
쓸모 없을 거라고 , 내 존재에 대해 별 관심 없었던 내가 이렇게 맑은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녀는 연주를 마치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세월의 흔적일까요, 그녀의 얼굴이 꽤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처음에 몰라봤을 정도로요.
"역시.... 너구나"
그녀는 살며시 웃어 보였습니다.
저를 알아본 것일까요?
"그의 플루트와 비슷한 소리야... 너무나도 포근해... 그건 연주해보는 내가 제일 잘 알 수 있어..."
그녀는 따뜻한 손으로 저를 꼭 쥐고서는 값을 지불하고 떠났습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묻혀 있다는 곳으로.
그녀는 묵묵히 기도를 하고 나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신비한 소리.
그치만 너무나도 슬픈.
그녀는 연주를 마치고 그의 묘지 앞으로 다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나... 다시... 플루트를 연주해도 될까요 ? 이 플루트... 꼭 당신과 함께 있는듯한 기분이야..."
저는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플루트입니다.
제 주인은 세상에서 가장 상처 많은 음유시인입니다.
아픈 상처가 많기에 이렇게 아름답고 성숙한 음색을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 번 말할게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맑은 소리를 내는 플루트입니다.
제 주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주를 하시는 음유시인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언제나 그녀를 지켜봐 주는 사람들이 있구요.
우리는 주목 받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으로써 세상에 주목 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제 상처를 딛고 일어설 거에요.
그리고는 저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연주해 나갈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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