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반의 단편집(Golvan's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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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lvan's Book

    고르반 지음

    서문

    도무지 끝을 낼 수 없는 결말에 지쳐 깜빡 책상머리에서 잠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깃털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이었으니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잠들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났을 땐 긴긴밤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오래된 기분이었다.

    당시 일어나자마자 썼던 글이 바로 이 808번째 단편이다. 이번 단편 역시 결말을 지을 수는 없었지만 왠지 누군가를 위해 남겨둬야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작품을 책으로 남긴다.

    또 이 기회를 빌어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해주는 광팬들, 그리고 나의 약혼녀에게 다시 한번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모두의 칼

    1
    "이 칼은 내 칼이 아니오!"
    여행자가 말했다.
    "내 칼은 더더욱 아니오."
    대장장이가 말했다.
    "도대체 이 칼의 주인은 누구란 말이요?"
    대장장이의 뻔뻔한 대답에 여행자는 분을 참지 못하고 칼을 겨눴다.
    "이름도 모를 이 칼로 당신을 베고 싶지 않소. 내가 맡긴 칼을 내놓으시오."
    대장장이는 코웃음 쳤다.
    "걸음마보다 쇠질부터 배운 놈이 그깟 칼날 무서워할까봐! 어디 내 목을 베보슈. 맡겨둔 칼이 나오나. 누가 바꿔간 모양이니 그거라도 가져가던지 말던지 알아서 하시오."
    어쩔 수 없이 여행자는 이름 모를 칼을 가지고 대장간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2
    "어찌하여 처음 쥐어 보는 칼이 이리도 얌전한가?"
    여행자는 처음 쥐어본 칼자루의 결이 너무도 익숙해서 놀라고 말았다. 여행자는 꼼꼼히 칼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칼등에서 희미한 문양 하나를 발견했다.
    "이 문양은 분명 산너머 성의 표시다. 내 칼을 가져간 녀석을 찾을 수 있겠군."

    3
    산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선택한 것은 실수였다. 오래 전에 수비대의 발길이 끊겼다는 사실을 여행자는 알지 못했다. 굶주렸던 온갖 산짐승들이 기다렸다는듯 여행자에게 달려 들었다.
    "주인의 허락 없이 칼에 피를 묻히게 됐구나. 부디 용서하기를."
    당장 여행자를 지켜줄 것은 이름 모를 칼뿐이었다. 반나절이면 도착할 줄 알았던 길은 밤이 깊어지도록 계속됐다.

    4
    라데카가 산기슭에 기울어져서야 여행자는 성에 도착했다. 늦은 손님을 반겨주는 곳은 여관을 겸한 주점 뿐이었다. 여행자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술을 들고 있었다. 여행자도 자리를 잡고 주점 주인에게 주문을 넣었다.
    "목탄 있소?"
    주점 주인은 아무말없이 술잔에 목탄을 담아 내놓는다. 여행자는 탁자에 자신의 칼을 쓱쓱 그려 보인다.
    "이런 칼을 들고 다니는 자를 본 적이 있소?"
    주점 주인의 무관심에 여행자가 금화 몇 닢을 탁자에 내려 놓는다. 그제서야 주점 주인은 한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5
    사내가 입을 연 것은 이빨이 몽창 박살난 후였다.
    "근...근처 대...대장간에 수...수리를 맡겼습니다."
    원하던 답변을 들은 여행자는 사내의 뒷덜미를 후려쳤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내에게 여행자는 이름 모를 칼을 던져 주었다.
    "얼굴을 그리 만든 건 이해하시오. 칼에 주인의 피를 묻힐 순 없어 그리 한 것이니."

    1
    대장간에 들어온 손님을 보고도 대장장이는 쇠질을 멈추지 않았다. 여행자는 제 칼 크기만큼 팔을 벌리며 말했다.
    "내 칼을 찾으러 왔소만."
    대장장이가 칼 한자루를 여행자에게 던져 주었다. 반가운 마음에 받아든 칼은 생전 처음 보는 칼이었다.
    "이 칼은 내 칼이 아니오!"
    여행자가 말했다.
    "내 칼은 더더욱 아니오."
    대장장이가 말했다.
    "도대체 이 칼의 주인은 누구란 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