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바튼은 이멘마하보다 작은 도시임에도 사람 많기로는 이멘마하를 앞지르는 번화한 도시이다.
그도 그럴 것이, 티르 코네일과 반호르, 그리고 이멘마하를 잇는 교량과도 같은 도시이니까.
사람이 많은 만큼 사건도 많고, 그래서 북적북적 활기찬 도시가 바로 던바튼이다.
그리고 요즘, 이 사람 많은 도시에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기묘한 명물(?)이 등장했다고 한다.
"호호호, 이번에도 참 잘 해 주었구먼. 벨이 없었을 땐 어떻게 일을 했었는지 모르겠다니까."
"뭐, 늘 하는 일인데요 뭘. 어서, 알바비나 주세요- 늘 받던 대로 가장 돈이 큰 걸로요-"
"그래 그래. 아무렴, 설마 내가 떼먹기라도 할까 봐? 숨이나 좀 돌려요. 그러다 숨 넘어가겠수."
"그게, 급하단 말예요. 이번에 누구누구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열매 따기 알바를 주는 바람에 다음 아르바이트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되어버려서."
"오늘은 열매가 필요했으니 할 수 없었다우. 그렇다고 벨만 특별취급 하면 다른 알바생들이 뭐라고 하겠수?"
"알았으니까, 어서 빨리요, 빨리-"
"옛수. 아이쿠, 천천히 가요, 그러다 넘어져요!"
햇살 따가운 던바튼 일상의 오후이다. 이맘때면 더위가 최고조에 달해 광장 블록들 위로 지글지글 아지랑이가 피어 오를 정도다. 오전 중엔 거래니 공연으로 분주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 나무그늘 아래 모여 앉아 하릴없이 잡담을 나누는 것 외엔 달리 무언가 할 엄두를 못 내는 후끈한 열기가 성내 가득하다.
그런데도 벨은 글리니스에게서 알바 보상이 든 금화주머니를 넘겨받기가 무섭게, 그 무더운 던바튼 광장을 가로질러 부지런히도 서점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벨의 작은 몸이 통통거릴 때마다 부드러워 보이는 금발이 찰랑 찰랑 햇빛처럼 반짝였다. 글리니스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열두 살밖에 안된 어린아이가..."
광장 그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던 여행객들도 잠시 대화를 멈추고 벨의 뒷모습에 눈길을 준다. 글리니스의 눈빛과 같은, 안되어 보인다는 듯한 동정의 감정이 그들의 얼굴에서도 읽혀진다.
-벨은 요즘 던바튼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이야기되는, 던바튼의 명물(?)이었다.
꼬맹이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고집 있는 초록빛 눈동자와 신경질적으로 앙 다물려 진 입술이 다소 애늙은이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아이답게 제법 귀여운 느낌이 남은 소년이 새벽 닭이 울 때부터 이웨카가 어지간히 궤도에 오를 때까지 쉴 새 없이 던바튼을 뛰어다녔다.
제 몸집보다 큰 양털을 이고 낑낑거리며 마누스에게 들리는 일을 시작으로, 한 손으로는 다 잡히지도 않는 물레를 돌려가며 발터가 주문한 매듭 끈을 만들어낸다. 행여 땅에 끌릴까 무거운 갑옷을 어깨에 들쳐 매고 배달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크리스텔의 살인적인 사과알바조차 이럭저럭 그래도 혼자 힘으로 해내는 것이다.
으레 가장 늦게 끝나는 네리스의 알바를 끝내고 나면 이미 이웨카가 중천에 떠 있다. 그제서야 관청 옆 공터에서 새우잠을 자고, 그나마 짧은 잠 편히도 못 자다가 어둠이 어스름할 무렵 부스스 일어나서는 졸린 눈 부비며 양털을 채집하러 성을 나선다.
-그리고 그러기를 벌써 삼 년째이다.
'아직 어린 아이가 독하기도 하지. 하루도 쉬는 날도 없이...'
'애 부모가 대체 뭐 하는 사람이래?'
'...부모가 없다나봐.'
'어머, 불쌍해라..'
벨의 사정을 대강 아는 던바튼의 상주 여행자들은 그래서, 가끔 분주히 달려가는 벨을 불러 세워 지나쳐가듯 나무열매나 딸기우유를 그 가느다란 손에 쥐어주곤 하기도 했다.
벨은 그저 살풋 웃으며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하고는 다시 알바하느라 여념이 없지만 서도.
더욱이 벨이 고집스럽고 딱 부러져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둔한 면이 있어서, 사실 벨은 그 사람들이 특별히 자신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자신이 던바튼의 조금은 미묘한 명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그저 오늘도 열심히 던바튼 알바 일주를 돌 뿐이었다.
던바튼은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티르 코네일에서 갓 상경한 풋풋한 촌 사람도, 반호르에서 수제 호미니 단검을 싸 들고 올라온 보부상도, 그리고 이멘 마하에서 분실물을 찾으러 행차하신 부르주아도 모두 던바튼 광장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런 만큼, 에린의 온갖 소문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무더운 던바튼 광장에, 던바튼 주민들을 술렁거리게 할 이야기를 안고, 한 여행자가 방문하였다.
그는 여느 평범한 여행자처럼, 다른 도시로 가는 길에 지친 몸을 쉬고자 던바튼의 식료품점을 찾았다.
그는 티르 코네일 출신이었는데, 이멘 마하에 살고 있는 친척의 결혼식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멋도 모르고 티르에서 던바튼까지 두 다리로 걸어오긴 했는데, 이게 도저히 사람이 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결혼식 날짜는 촉박하지, 결혼식에 너덜너덜 지친 상태로 참석하는 것도 안될 말이라, 말로만 듣던 밀납의 날개를 살 겸, 빈 배도 채울 겸 식료품점 옆 나무그늘에 몸을 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다른 여행자로부터 밀납의 날개는 가본 적 있는 도시로만 이동할 수 있다는 말에 좌절하다가 또 다른 여행자가 마침 이번 밤에 이멘 마하로 가는 문게이트가 열린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말에, '그럼 나도 문게이트란걸 타볼까'하며 수중의 음식을 나눠가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늘 있는, 던바튼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티르에서 나오신 게 이번이 처음이시라구요?"
"네. 근처 던전을 가거나 평원의 늑대들을 잡거나 했지요."
"티르 코네일 평원에는 늑대가 그렇게 많다면서요?"
"말도 마세요. 사람들은 아예 '검은 늑대밭'이나 '회색 늑대밭'이라고 부를 정도니까요."
"세상에나.."
"게다가 가끔은 변종 거대 늑대도 출몰한답니다. 여간 큰일인게 아니에요."
"그렇겠어요.."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금발의 다소 마른듯한 소년-벨이 그들 앞을 뛰어 지나갔고, 그들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벨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
티르의 여행자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꺼내자, 한 여행자가 절래절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마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벨이라는 꼬마예요. 아이가 어찌나 부지런한지, 꼭두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하루 종일 알바만 한답니다. 그러기를 삼 년, 노는 것도 못 봤어요. 들리는 말로는 의지할 가족이 없어서 그런다는데, 그래도 아이라서 또래가 그리울 텐데. 참 안됐어요."
"가족이 없다구요?"
그러나 티르에서 온 여행자의 반응은, 통상적인 동정이 아닌, 이상하다는 듯한 반문이었다.
"뭔가, 벨에 대해서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저 아이, 티르 토박이라면 아는게 당연한 일이죠."
"네에에?!"
티르의 여행자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물론,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티르에서 온 여행자를 쳐다보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하는 수군거림이 던바튼 광장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던바튼 식료품점 앞은 느닷없는 즉석 공연장이 되었다.
그 주인공이 유명한 음유시인이 아닌, 티르에서 온 한 평범한 여행자라는 것이 색다른 점이었지만.
벨에게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가족'이 없는 게 아니라 '부모'가 없는 것이었다.
던바튼의 사람들은 벨의 혼자인 모습만 보고 당연히 벨이 천애고아일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벨에게는 '부모'는 아니지만 '부모'와 같이 의지할 만한 손위 누이가 있었다.
-아니, 이것도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전혀 의지가 안되는 누이였지만.
나이상으로는 충분히 의지가 되고도 남을만한 누이였다.
벨의 누이는 올해로 서른이 되는 과년한 처자로, 이름은 이안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 이안이라는 처자는 티르에서는 또 나름대로는 유명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첫째는 제법 아름답다고 해줄만한 외모 때문이었다.
새하얀 피부와 늘 웃고 있는 커다란 회색 눈동자, 우아하게 구불거리는 회색 머리칼에 어쩐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희박한 무게 감의 날씬한 몸체는 생기있고 푸릇푸릇한 티르와는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런데, 더 관심을 끄는 건 이 처자의 기묘한 생활행태였다.
언뜻 보기엔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 단지, 그녀는 광장 앞 나무그늘 아래 앉아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계속, 계속 앉아있기만 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 계속.
"...뭐, 뭡니까 그 사람.."
"들리는 말로는, 몸이 아파서 티르에서 요양 중이라고 하더군요. 가족은 던바튼에 있는데."
"...아... 그래서..."
던바튼 사람들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벨은 몸이 아픈 누이를 위해 그렇게 열심이었던 것이다. ...가엾은 벨...
"그런데."
티르에서 온 여행객은, 그러나, 침묵을 깨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더욱 기가 막힌 점입니다. 세상에, 계란 먹고 체했다고 20년 동안 요양이라니, 말이 됩니까, 보통?"
"...계란 먹고 체해서..."
"이십 년 동안 요양이라구요...?!"
순간 장내는 고요해졌다. 모두의 표정은 하나같이 벙쪄있었다.
티르에서 온 여행객은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네. 체했다고 이십 년 동안 요양이라뇨, 언어도단이죠. 그런데 최근 들어서,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 같더란 말이죠. 게다가, 예전엔 살 엄두도 못 내던 음식이나 옷 같은 것도 가끔 사고, 책도 사는 것 같더군요."
꿀꺽. 그는 침을 삼켰다. 덩달아 꿀꺽. 청자들도 어느새 그에게 몰입해 있었다.
"...순진한 남동생한테 이래저래 뜯어낸 돈으로 말이예요."
순간 모두들 분노하였다. 저 어리고 약한 꼬마를, 과년한 처자가, 속도 없이 홀랑 벗겨먹고 있다니! ...그것도 가족이면서!
"아니, 정말 뭡니까, 그 처자!"
"그건 이미 아픈 환자의 선을 넘어선 거라구요!"
",라고 할까, 그게 환자입니까?! 난 빵 먹고 체해도 하루 후면 멀쩡하다구요!"
"무슨 소리! 나는 한 시간만으로도 회복엔 충분해요!"
"네 네. 티르에서는 그 처자를 '게으른 이안'이라고 부르죠. 거의 게으름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예요. ...착한 사람이긴 한데, 어딘가 생각이 약간 핀트가 어긋나서는, 꼭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어느덧, 대기는 장밋빛으로 물들었고, 동쪽 하늘 저 켠에 이웨카의 이마가 보일 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티르에서 온 여행객은, 주섬주섬 늘어놨던 짐들을 챙기며 이런 말을 남겼다.
"이안은 단지 사람이 너무 게으르고 멍할 뿐이지, 정말 나쁜 사람은 아니랍니다. ...다만, 벨이 너무 안됐어요. 누님을 위해서 어린아이가 너무 고생하지요.."
"하아..." 모든 알바가 끝나고 이제서야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벨은, 딱딱해진 어깨를 토닥이며 관청으로 향했다.
관청 옆의 작은 공터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아 아늑하면서도 안전해서 거의 집처럼 삼아버린 터였다.
"어? 무슨 일이세요, 모두들..."
그리고 오늘, 벨은 관청 앞 계단에 점점이 앉아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그들은 벨을 발견하자 엄청난 기세로 눈을 번뜩이며, 어깨를 다투어 벨에게 다가왔다.
"...이... 야심한.. 밤에...?"
벨은 어안이 벙벙하여 더듬더듬 문장을 이어가며 뒷걸음질 쳤고, 그들 중 한 사람이 돌연 벨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벨! 네 누이 이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벨의 무표정한-때로는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입이 살짝 웃었다.
"그래요? 누님은 잘 계신대요?"
"그래! 네 누님이야 너무 잘 계시지!"
"다만!"
"우리는!"
"네가 걱정이 되는구나!"
박력넘치게, 그들은 벨을 붙잡고 외쳤다.
"...제가요?"
눈을 깜박이며 되묻는 벨, 역시나, 벨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거다.
"네 누나 이안은 말이야, 벌써 훨씬 예전에 병같은것 다 나았단 말이다!"
"그리고 계란먹고 체한건 병이라고도 말 못하지! 나는 한 시간만으로 충분한걸!"
"..그, 그거 다행이네요."
아아, 너무나도 둔한 벨은, 아직도,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엾은 아이를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가 꼭 나서야만 했던 거야!
아니면, 아마 평생 몰랐을 테니까...
"네 누나 이안은, 그저, 그저 게으를 뿐이야."
"나이가 그렇게 되도록, 아무것도 안하고 시간만 보내다니..."
"그리고 넌 누님의 게으른 생활을 위해 죽도록 일하고 있는 거고."
"...네?"
이제서야 조금,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들은 벨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밀납의 날개였다.
"이건.."
"밀납의 날개다. 지금 네 누님을 찾아가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렴. 네 누님은 지금 확실히 좋지 않은 상태란다. 나이 삼십이 되도록 변변한 일 하나 안하는 백수라니. 그렇게 게으르기만 해서, 사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니? 그건 널 위해서도, 네 누님을 위해서도 좋지 않단다. 가서, 누님을 잘 설득해보도록 해라.."
"..."
벨은 아무 말 없이 밀납의 날개를 꼭 쥔 채 그들을 올려다 보았다.
눈가에, 눈물이 어린 듯, 눈이 가로등 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어서..!"
"...고맙습니다."
무언가 할말이 많은듯한 얼굴을 하고, 벨은 그저 고개를 꾸벅이며 이 말만을 남겼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그의 표정에서, 그들은 저 무뚝뚝한 신경질쟁이 꼬마가 지금 자신들에게 커다란 감사를 표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꿈자리는 왠지 좋을 것 같단 말이야."
"착한 일 하고 나니 기분은 좋네!"
두런두런.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각자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벨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서 들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넌 누님의 게으른 생활을 위해 죽도록 일하고 있는 거고.'
'네 누님은 지금 확실히 좋지 않은 상태란다. 나이 삼십이 되도록 백수라니.'
'그렇게 게으르기만 해서, 사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니?'
벨은 혼란스러웠다. 세상에서 단 한 사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누님인데,
'나는 지금까지 누님을 나쁜 상태로 몰고 갔던 건가?'
벨은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산더미만큼. 처음 누님의 모습이 무척 마음아팠기 때문이다.
쌀쌀한 밤인데도 달랑 여기저기 해어진 초보자 옷을 걸치고, 바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네가 벨이구나. 미안, 나 이렇게 앉아서 너를 마중해서. 난 이안이라고 해. 네 누나란다.'
'누님? 왜 일어날 수 없는데요?'
처음 에린에 오던 날, 광장 위 큰 나무가 있는 언덕에 앉아있던 이안과 벨은 처음 만났었다.
광장에서 이안을 올려다보며 물어보는 벨에게, 이안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응.. 나, 배가 고파서...'
뭔가 먹을 것을 주고 싶었고, 다른 입을 옷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얻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돈이 많다면, 모두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만큼, 그만큼 누님이 행복해 질 거라고...
'저, 던바튼에 갈 거예요. 거기서는 여기보다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더군요.'
'...벨. 돈이 벌고 싶은 거니?'
'네. 아주 많이 벌어서, 누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어요.'
'......한데...'
'네?'
이안은 그때 웃었다. 벨은 이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을 수 없었지만, 그 웃음으로 미루어 이안이 벨의 결심을 기뻐한다고 생각했었다.
'아주 많이 벌어서 돌아올게요. 필요하신 돈은 은행에서 찾아 쓰시면 돼요.'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잘 다녀와..'
이안은 웃었었다. 여느 때처럼, 아주 기쁜 듯이. 적어도 벨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라? 벨이잖아?"
티르 코네일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여관으로 내달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벨의 등뒤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 누님?!"
"오랜만이구나, 그간, 어떻게 지냈어?"
이안은 변함없이 광장 위 나무가 있는 언덕에 앉아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벨은 광장 가운데에서 그런 이안을 올려다보는 모양이 되었다. -마치 처음 그날처럼.
"누님은 변한게 없으시네요."
조금, 예전보다 조금은 얼굴이 생기 있어 보이고, 옷도 좋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벨은 많이 변했구나."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괜히 벨은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마을사람들에게 누님 소식을 들었어요."
벨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의 발치 앞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을 뿐이었다.
"누님, 이젠 건강해지셔서, 쉬고 계시지 않아도 좋다고 말예요."
"..."
"...그리고, 누님이 이렇게 게으르게만 사는 거, 누님한테 나쁜일이라고, 옳지 않은 일이라고, ...그러더군요..."
"..."
이안은 말이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벨은 문득 언덕에서 아무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놀라 고개를 들자, 마치 공기처럼 이안이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벨, 너는 게으른게 나쁘다고 생각해?"
"나쁜 거잖아요.. 아무 일도 안하고, 그저 시간만 보낸다는 거, 사는게 무의미해 진다는거..."
이안은 웃었다. 마치 그날, 벨이 던바튼으로 떠나던 날 배웅하던 그때처럼.
"아무일도 안하진 않아. 계란을 줍고, 열매를 따고, 책을 읽어. 다만, 다른 또래 사람들보다 적게 할 뿐이야. ..다들 곰을 잡고 던전을 탐험할 때, 나는 앉아서 광장을 내려다 봤을 뿐이란다."
"그치만, 그래서 누님은 변변찮은 일도 못하시잖아요? 그런건 누님을 위해서 좋지 않다고..."
"..."
이안은 다시 말이 없었다. 벨은, 자신의 말이 심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틀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누님이니까,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벨은 이안이 상처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이 심했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벨, 나는 보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어."
그러나 이안은, 여전히 공기같이 엷게 웃고 있었다. 이안이 말했다.
"나는 보고 많은걸 생각해. 하늘은 아침엔 분홍색이었다가 오전엔 창백하고, 오후엔 새파래.
사실은 저녁 햇살이 가장 따끔거리고, 그래도 저녁이 기분좋은건 산들바람이 불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웃는데, 친구라고 하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원수가 되기도 하고.
그런데도 변함없이 꽃은 피어있고, 여우가 아무리 잡아먹어도 닭들 병아리들은 여전히 분주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우는 사람을 봤어.
증오했던 사람이 사실은 가장 믿을만한 친구였다고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도 봤지."
바람이 불었다. 벨은 조금, 춥다고 느꼈다. 이안의 눈이 빛났다.
"난 게을러. 아마도 사람들이 말하는 '게으르다'는 말은 내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겠지 싶어.
난 적게 움직이고, 적게 해. 하지만 난 많이 보고, 많이 생각했어... 벨, 알 수 있겠니?
부지런한 사람들은, 아마도 대부분의 부지런한 사람들은, 많은걸 몰라.
왜 자신이 기쁜지, 왜 자신이 슬픈지, 어째서 행복하다가도 금세 절망하게 되는지.
왜 세상이 아름다운지, 아니, 세상이 아름다운지나 한 건지, 모르고 살고 있어..."
"...아니, 어쩌면 모두들 알고 있을거야. 하지만, 나에겐, 남들보다 알아내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해.
내가 남을 믿고, 내가 남을 증오하는게 나를 기쁘고 슬프게 만드는 거야..
나는 남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었다고 해.
또, 나는 남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가 좋은 사람이었었다고 해...
어쩌면 말이야,
저 하늘처럼, 꽃처럼, 그냥 그대로인 사람을, 내가 나쁘다 좋다 생각한거야..
여우가 아무리 닭들 병아리들을 못살게 굴어도, 닭들 병아리들은 그 자리에 있어.
...마치, 나쁜 일 좋은 일이 모두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인 것처럼..."
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이안의 말이 어딘가 이안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꼭 어딘가로 훌쩍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그래서 벨은 이안이 한 말이 떠나지 못하도록, 계속 생각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벨이 티르로 떠난지 벌써 사흘이 지났네."
여전히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던바튼 광장. 식료품점 옆 가로수 아래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누구는 '잡챈 팝니다'라는 피켓을 세워논 채로, 누구는 분양 받은 고양이를 데리고 놀면서.
정말 평범한 던바튼 주민들의 일상이다.
"돌아오지 않는 걸로 봐서, 아마 누님이랑 티르에서 살기로 된 모양이지?"
"그 모습을 못본다는건 좀 아쉽네."
"그래, 특히 양털뭉치를 이고 뛰어다니는 거, 귀여웠지.."
"그래.. 정말 귀엽다."
"응, 정말 귀엽... ...어?!"
그들은 눈을 부볐다. 광장 너머 큰 길 가운데, 엄청난 양털뭉치를 이고 총총 힐러집 쪽으로 뛰어가는, 금발의 약간 마른듯한 소년 -벨이었다.
"벨!"
"벨, 어떻게 된거야, 다시 알바 하는 거야?"
그들은 소란스럽게 힐러집으로 뛰어가, 마침 힐러집을 나서는 벨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예? 아, 저번에 밀납, 고마웠습니다."
"-그것보다, 왜 다시 알바 하는거야?"
"에? ...그야, 돈을 많이 벌고 싶으니까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하는 벨을 보고, 그들은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아니,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도, 아직도 누님을 위해서 알바를 하려는 거야?"
"...아."
"'...아.'가 뭐야, '아'가. 대체 어떻게 된거니?"
벨은 살짝. 웃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신세진 것도 있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으니, 이야기 해 드리고 싶네요. ...우선 잡화점으로 가실까요? ...알바시간이라서."
돌돌돌. 벨은 가죽 끈을 만들면서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벨의 '꾸직'거리는 모습이 다소 거슬렸지만.)
그의 이야기는 놀랍고 놀라워서, 그들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벨, 난 사실 내가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세상을 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른걸.
나쁜 일 좋은 일이 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필요한 것처럼, 세상은 부지런한 사람, 게으른 사람을 다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아름다운 세상이 되려면 말이야."
벨은, 정확히는 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뭔가 이안의 생각을 조금 알게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사람들의 말처럼, 누님의 '게으름'은 결코 누님에게 해로운 게 아니었다.
"은행에 가면 네가 벌어준 돈이 있어. 만약 내가 뭔가 하고 싶은데 은행에 돈이 있다면, 난 할거야.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 번 돈이라고 했으니까, 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쓸 거야.
하지만 돈이 없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도 난 행복할거야.
그것 외에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일을 또 찾으면 되니까 말이야. ...
...난 아마 평생 행복할거 같아..."
"...그래서 전, 누님이 그렇게 행복해하는 '게으른'생활이 어떤 건지, 한번 체험해보고 싶었어요. 아니, 그게 그렇게 행복하다면,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죠."
"그래서 누님과 함께 생활해 본거야?"
"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굉장히 편안했어요. 누님 말처럼, 알바에 정신 없었던 때는 몰랐던 세상의 아름다움이나 이런저런 주변 일들을 알 수 있었고, 무척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이안은. 정확히 표현하자면, 금전감각이 없었다.
이것도 그녀의 게으름 아닌 '게으름'처럼, 금전감각 없음 이 아닌 '금전감각 없음'이었지만.
-그녀는 돈이 허락하는 한 내키는 대로 했다.
맨 처음은 그럭저럭 허용될 만 했다. 고작해야 맛있는 음식을 사거나, 값싼 책 몇 권을 사는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벨과 처음으로 책을 읽던 이안은, 벨이 책을 읽기에는 눈이 나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도, 가엾게도,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노안성 원시였다.
벨은 멀리 보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지만, 책과 같은 작은 글씨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영 힘들어했다.
이안은 그저, 순수하게 벨을 위하는 마음에서, 벨을 위해 말콤이 파는 안경을 덜컥 사다가 벨에게 선물하였던 것이다.
물론, 벨이 피땀 흘려 번, 은행의 돈으로.
"...헉..."
그들은 잠시 말을 잊었다. 안경. 얼마나 비싼 장신구(!)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정말 어떠한 악의나 고의 없이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는 이안의 순수함(?)과, 그럼에도 누님에 대해 여전히 저렇게 웃는 얼굴로 말하는 벨의 어리버리함(?)이 감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벨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새것이라는 티를 온몸으로 내는 맨질맨질한 갈색 나무테 안경을 꺼내 써보였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쉬고, 이렇게 말했다.
"전 그때, 완전히 우리 둘의 상황과, 그리고 누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나쁜 일과 좋은 일, 게으른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 모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거였어요..."
".........누님... ..은.. 은행 잔고가 52골드로군요..."
"음? 그러니?"
".........당분간 여관에는 외상으로 묵으셔야 겠네요..."
"음? ...돈 없으면 여관에서 나와도 상관 없지만."
이안은 웃고 있었다. 벨은 생각했다. -이사람, 진심으로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
벨은 생각했다.
누님이 찬 밤바람 맞으며 언덕에서 밤을 지새는것따위, 바라는 바 아니다.
돈이 없어도 누님은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돈 쓰는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라, 은행잔고가 없잖아. 할 수 없지. 밥 굶자.'라면서 터덜터덜 돌아서는 모습 따위 상상도 하기 싫었다. -적어도 그건, 벨에게 있어서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누님. 저 역시 던바튼으로 돌아갈래요."
"...왜? ..."
"역시 저는, 돈이 벌고 싶어요. 누님과 저, 둘을 위해서요. 누님이 그러셨죠?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 위해선 게으른 사람, 부지런한 사람 다 필요한 거라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둘이 행복 하려면, 한 사람이 게으르다면, 부지런한 한 사람도 필요한 거라구요. 누님과 함께 하는 것도 행복하지만, 우리를 위해 돈을 버는 것도, 전 행복해요."
이안은 웃었다.
"...네가 그쪽이 좋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그리고 이안은 망설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가끔 편지로 소식 전해주거나, 티르로 놀러와 주겠니? 삼 년 만에 훌쩍 큰 동생을 보는 건, 조금 외로우니까..."
"...그래서, 전 다시 던바튼으로 돌아와서 알바를 하기로 한 거예요. 누님을 위해서지만, 나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이태껏 벨을 걱정하며 안절부절이던 던바튼의 사람 좋은 참견꾼들은, 이젠 감동스럽다는 듯 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남매애로구나."
"이안누님께서 안부 전해달라셨어요, 저를 티르로 찾아가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도."
이야기 도중 잡화점 알바를 마치고 시몬을 도와 가디언 장갑을 재단하던 벨은, 어느덧 마지막 장갑의 마감질을 하고 있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벨이 고개를 꾸벅였다. 왠지, 예전보다 조금 더 솔직해 진 것 같았다.
-꼭, 그 또래 아이들처럼.
"하핫, 뭐, 그런걸 가지고."
"그래, 아무튼 잘 되었다니 다행이다."
그들도 이젠 정말 진심으로 뿌듯한 마음이 되어서, 편안하게 벨에게 웃어줄 수 있었다.
이웨카가 떴다. 던바튼의 하루가 또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정말, 어쩌면 벨의 이안이라는 누님 말이야, 굉장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뭐야, 뜬금없이?"
"...그냥, 지금 문득 바라본 던바튼의 저녁하늘이 굉장히 아름다운 것 같아. 평소에는 그냥 그렇구나 싶었는데."
"후후후.. 갑작스럽게 음유시인이라도 되어버린 거야? 하늘이... ... ...정말... 예쁘잖아.."
"그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단지 세상을 조금 특별하게 바라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왠지 정말 세상이 전보다 더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이안이라는 사람,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걸까."
"...어떻게 생각하면, 벨, 정말 축복받은 꼬맹이일지도."
둘은 웃었다. 알 수 없는 훈훈한 느낌에 웃었고, 그런 자신들이 우스워서 또 웃었다.
그리고 돌연,
"으악!!!!!!!!"
하고, 은행 쪽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티.. 티르 은행에서, 축포 100개를 찾아갔다구요?!! 전재산인데?!!!"
...가엾게도, 벨의 목소리였다...
"...방금한 말 취소할래. 정말 벨이 가엾다.."
"...이안이라는 사람, 정말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구나..."
뭐, 세상이라는 게 또 그런게 아닐까.
'서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법에 대한 비교 고찰(Comparing Study of Magic) (0) | 2021.03.17 |
---|---|
류트를 연주하는 소년(A Boy with Lute) (0) | 2021.03.17 |
노래하는 나무(Song of the tree) (0) | 2021.03.17 |
낭만 코볼트(Every kobold has its romance) (0) | 2021.03.17 |
나무(The Tree) (0) | 2021.03.17 |
나는 '종이 비행기'입니다(I am a paper plane) (0) | 2021.03.17 |
꼬맹이의 작은 선물(A Little Present of The Little) (0) | 2021.03.17 |
그녀가 만든 치즈빵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Very Special Cheese Bread of Hers) (0) | 2021.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