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나요? 잃어버렸던 그대의 기억이?.
그것은...
눈이 내리던 들판위에 맺어진 약속.
차갑고, 두렵고, 시리고, 가슴 아팠던 그 이름이,
따뜻한 눈물을 흘리며 녹기 시작했던 날의 이야기.
소녀의 머리칼은 은빛이었다. 마치 오래 전에 얼어붙어버린 꽃잎처럼, 가냘프면서도 분명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 은빛의 반짝임은, 마치 나의 아련한 옛 이야기를 생각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가끔 먹구름들 사이로 팔라라가 얼굴을 내밀 때면, 그 머리칼은 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내가 그 소녀에게 처음으로 받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에린에는, 꽃이 피나요?"
사실 그 질문에 내가 정확히 어떠한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소녀의 말투였다. 꼬집어 말하자면, 그저 순수한 궁금함이라기보다는 강한 의구심과 부정적인 인식이 내면 깊숙한 곳에 뿌리박혀 깔려 있는 듯한 어조. 그 차갑고도 날카로운 소녀의 말투에서, 당시 한창 흩뿌리던 눈발의 차가운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으리라.
눈, 또 내리고 있어.
...응.
이 눈, 언제쯤이면 그치는 걸까? 과연 그치기나 할까?
그럴 리가 없지. 여긴 시드 스넷타인걸.
그렇다. 이곳은 시드 스넷타. 에린 전역에서, 춤추며 내려오는 하얀 눈발이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지역. 하지만 그것은 슬프게도, 너무나 상대적이고도 부정적인 이면조차 포함하고 있는 호칭이었다.
꽃. 꽃이 피지 않았다. 어느 샌가부터, 꽃이 절대로 자라날 수 없는 차디찬 겨울만이 계속되었다. 그게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그건 아마도 내가 소년티를 채 벗지 못했을 적, 이 소녀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리라. 이 지역 근처에 사는 아이들 중에는 꽃이란 것이 있다는 얘기만 듣고 실제로는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생겼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니까. 꽃은 생김새가 그 종류에 따라 다르다고 수십 번 이상 말해도 '둥근가요?', '뾰족한가요?'하고 되묻는 녀석들 때문에 곤욕을 치룬 적도 있지만 그건 덮어두도록 하자.
... 꽃? 그런 게 필 리가 있냐? 이 지방에서?
그래도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야. 우리 여기다 한 번 심어보자.
피어봤자 다 얼어 죽어버릴 뿐이라구.
그래도 괜찮아, 난 너와 함께 꽃을 심고 싶으니까.
솔직히 아이들의 그런 이야기는 나로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과거에도 눈이 많이 내리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하고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어본다. 중년을 훌쩍 넘겨버린 나로써도, 어렸을 때는 소꿉친구와 함께 꽃을 심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누구와, 어떤 꽃을, 어디에 심었는지, 그리고 그게 과연 피었는지조차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다. 단지 함께 심었던 소꿉친구가 지금 내 옆에 서있는 소녀와 닮은 은발의 소녀였다는 사실만이 기억날 뿐. 물론 시드 스넷타 자체의 기후 특성 때문에 툭하면 심었던 꽃이 얼어 죽곤 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꽃이 저절로 피어나거나, 전파되는 것조차 되지 않는다. 이 땅에서 꽃이 더 이상 뿌리내리지도 못할 정도로 봄을 무참히 빼앗아간 건 누구일까. 과연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거 봐, 내 말이 맞지? 금방 눈이 와서 완전히 파묻혀 버렸잖아.
그러네...
이런 곳에 심으면 하룻밤 사이에 다 얼어 죽고 만다니까?
...
하늘에는 온 세계를 뒤덮으려는 이불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평소 때와 똑같은 풍경. 전혀 다르지 않은 시드 스넷타의 모습. 하지만 왠지 모르게 '흰 이불'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따뜻하고도 포근해 보이는 함박눈발이 흐린 하늘을 수놓았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던 색채 잃은 땅조차도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듯 하얗게 덧칠해져갔다. 소녀와 나는 그렇게 희게 물들어가는 세상을 앞에 두고, 내리는 눈송이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어가며 서 있었다. 마치 아까 우리가 나누었던 꽃에 대한 희망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뿌려대는 먹구름이 쌓여가는 눈 위에 약간의 잿빛을 덧씌우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꽃을 심는다면 이곳에 심는 게 제일 보기 좋겠지?
안 돼, 거기는 눈이 가장 많이 쌓이잖아. 분명 저번처럼 얼어 죽고 말거야. 도대체 왜 여기만 고집하는 거야?
어디에 심더라도 얼어 죽는 건 마찬가지일거야. 그래도 단 한 송이, 기적처럼 단 한 송이만이라도 피어난다면, 난 저 곳에 피었으면 좋겠어.
"만약 꽃이 피어난다면 저 곳에 피는 것이 가장 보기 좋겠지요?"
소녀가 갑자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소녀가 앞으로 내민 작고 하얀 손이 우리가 있던 곳의 정면을 가리켰다. 시드 스넷타의 눈 언덕, 아니 사실 언덕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낮지만, 그래도 꽃이 핀다면 멀리서 보기에 가장 눈에 잘 띄고 예쁘게 보일 것 같은 장소. 하지만 그런 만큼 꽃이 피기를 거부한다는 듯, 눈이 가장 많이 쌓이는 장소.
"하지만 그 쪽은 눈이 가장 많이 쌓이는 걸. 아마 피더라도 금방 얼어 죽고 말 거야. 벌써 저렇게 눈이 많이 쌓인 걸 봐."
나는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심정을 소녀에게 전했다. 눈에 띄지 않게 피더라도, 얼어 죽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어째선지 나는 그 곳에 꽃이 피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치 저 곳에 꽃을 심으면 반드시 곧 죽어버릴 거란 사실을 알고 있는 듯이. 그건 마치 잃어버렸던 나의 옛 기억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지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소녀는 약간 어두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곳이 아니라도 얼어 죽는 건 마찬가지일거예요."
그 후 한 동안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소녀의 머리칼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바람 따라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발처럼, 소녀의 마음속에 든 꿈도 흩어져버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슬슬 걸어 다니는 것이 불편할 정도로 깊게 쌓이고 있었다. 집에 돌아간다면 지금쯤은 돌아가야 될 텐데, 어째선지 소녀는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가를 반복한다. 어째서 소녀는 꽃이 피기를 저렇게 소망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도 단 한 송이, 기적처럼 단 한 송이만이라도 피어난다면, 전 저 곳에 피기를 기도할 거예요."
그리고 결국 최후에는 밝은 목소리와 함께 나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떼어낼 수 없는 슬픔이 봄날의 녹지 않는 눈처럼 남아있는 것 같아서 너무나 안타까웠다.
정말 많이 고민해 왔어. 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념할 수 있는 꽃을 한 송이 심고 싶다고.
....
그런데 얼어 죽지 않는 꽃은 없을까?
추위를 따뜻함으로 이겨내는 꽃은 없을까?
....
다음 순간 소녀는 내 곁을 떠나 곧장 달려 나갔다. 바람이 도달하는 곳, 그 곳을 향해서 발치에 차이는 쌓인 눈들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달려가는 소녀의 시야를 가려버릴 만큼, 아니 눈조차도 뜨기 힘들 만큼 거센 바람이 소녀의 얼굴을 사정없이 할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포기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 바람이 도달하는 곳, 눈처럼 희고 작은 손으로 가리킨 바로 그 곳을 향해서.
그래서, 이번에는 꼭 피어날 수 있도록 조금 특별한 꽃을 심어보려고.
... 뭔데?
얼음꽃!
... 그런 꽃이 어디 있어.
있어! 음... 그게 뭐나 하면... 비밀!
소녀는 그 언덕 위에 도달했을 때쯤,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온통 흰색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소녀의 몸에도 수많은 눈송이들이 흩뿌려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것일지. 내리는 눈은 그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추위 때문인지 자신을 덮는 눈의 차가움 때문인지, 소녀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만 같은 꽃잎의 여린 떨림처럼, 너무나도 애처롭게 보여서.
지금이 아니더라도 꼭 이 자리에서,
언젠가는 꼭 이 자리에서 피어날 거야.
.....
쌓이는 눈송이보다 더 희고 깨끗하게, 그리고 더 예쁘게 피어날 거야.
.....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손에 닿는 눈송이의 감촉이 부드럽다. 한 송이 한 송이 사뿐히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마치 눈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눈물이라고 생각기엔 너무나 차가운 느낌이었다. 마치 또 하나의 눈사람을 만들려는 듯, 눈은 계속해서 소녀를 덮어갔다. 온 세상이 온통 색채 없는 엷은 우윳빛. 단조로운 색상으로 통일되어 갔다. 흰색이 아닌 빛은 모두 덮어버리려는 심보인지 눈은 그치질 않는다. 이불, 그래. 누군가가 이불이라는 표현을 썼었지. 하지만 그 이불은 너무나도 차디차서 슬플 정도로 모든 것을 덮어갔다.
하지만 어째선지, 소녀의 머리 부분에만은 눈이 쌓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소녀를 향한 눈구름의 배려인지, 아니면 단순히 소녀의 은빛 머리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소녀는 두 손을 꼬옥 맞잡고 눈을 감은 채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 모든 눈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너무나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는 하나의 눈사람을 보는 것처럼, 소녀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아주 조금이지만, 지금까지 눈이 비춰주던 흰 색과는 다른 미묘한 빛이 그 곳에서 비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누군가가 흘린 눈물에, 차가운 눈이 녹고 있는 것이리라. 꼭 감고 있는 그 눈에서 흘러내린 한 방울의 눈물은, 너무나도 따뜻해서, 아무리 차가운 눈발이라도 금방 녹여버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럼 우리 함께 기도하자.
우리 이 담에 함께 이 꽃을 보러 왔을 때, 꼭 피어있게 해 달라고.
......
제발... 피어 있어 줘.....
......
괜찮아, 이제부턴 내가 꽃이 될 테니까...
......
부탁이야... 제발, 제발 피어나 줘.
"제발...피어 있어 줘……."
"......"
"괜찮아, 난 추워도 돼. 따뜻한 눈물로 이겨낼 수 있을 때면, 분명히 너도 피어날 수 있을 테니까."
"......"
"그러니까......"
목소리와 함께 눈 속에서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과 기억 속의 소꿉친구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렇게 겹쳐지는 현재의 소녀와 과거의 그녀의 모습은, 둘 다 한없이 내리고 있는 흰 눈의 색깔을 머금은 듯 찰랑거리는 은발이었음을 기억한다.
함께 꽃을 심었던 소꿉친구. 항상 제멋대로에, 남의 생각은 듣지도 않고 자기 고집대로만 하고 싶어 하던 고집쟁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무서운 말로 협박하던 협박쟁이. 항상 엉뚱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던 엉터리. 하지만 항상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했던 그녀. 그리고 그 언약의 증거로 꽃을 심고 싶어 했던 그녀.
그때나 지금이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나의 모습, 그리고 나와 함께 꽃을 심고, 함께 약속했던 그녀의 모습을.
있잖아, 우리 나중에 커서도 꼭 서로를 잊지 않기로 약속!
이 꽃을 걸고 약속하는 거야!
... 약속.
너, 만약 약속 어기고 잊어버린다면
더 이상 이곳에는 꽃이 살지 못하고 얼어 죽어버리고 말 거야. 후훗.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
눈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이 녹으면 눈물이 되는 것일까. 나도, 저 곳에 서서 기도하고 있는 소녀도, 따뜻한 눈물로 다시 한 번 눈을 녹이고 있었다.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조금씩 되살아나는 과거의 언약. 잃어버렸던 기억을 찾음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엮이는 작은 새끼손가락 두 개처럼 이어지는 약속. 쌓여가던 눈처럼 새하얗게 잊혀져갔던 나의 뇌리 속에서 다시 한 번 살아나는 기억의 빛살 한 줄기.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잊지 않겠다던 약속을, 이제야 겨우 지키게 되었다고.
나의 눈앞에서, 소녀는 점점 그 언덕에 발을 묶고 굳어갔다. 온통 하얀 세상 속에서 외로이 서 있는 한 소녀. 눈으로 온 몸을 온통 뒤집어쓴 볼품없는 모습이지만 세상 그 어떤 마음보다도 따뜻한 마음. 그런 소녀가 지금 내 앞에서 얼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꽃으로 새로 피어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먼 옛날, 그녀가 언젠가는 그 장소에서 필 것이라고 말한 진정한 얼음꽃이었다.
그거 아세요?
사실, 눈은 따뜻한 존재라는 거.
그 동안 시드 스넷타에 내내 눈만 내린 것도,
앞으로의 따스한 날들과 꽃들의 웃음을 위한 것이라고.
그 아이도 아마 따뜻했을 거예요.
따뜻한 눈이 만들어준 순백의 이불을 덮고,
흘린 한 떨기 눈물 방울방울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 시들지 않는 꽃으로 피어날 거예요.
소녀의 미소를 꼭 닮은 예쁜 꽃으로 말이에요.
추신 : 그 꽃은 어떻게 해서 전파되느냐구요?
후훗, 이건 비밀인데요,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가슴속에서부터 흘리는 눈물이 그 꽃의 씨앗이라나요. 방울방울 눈물지는 가슴마다 그 꽃이 피어난대요. 다른 이의 메마른 가슴에 씨앗처럼 또옥똑 맑은 눈물을 떨어뜨릴 때마다 그 꽃이 피어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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