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네의 하얀 수염과도 같은 거친 바람이 검빛 설산 코트 안의 살을 에운다. 올려다보는 하늘은 이웨카 한 조각도 들지 않는 참담한 잿빛. 하얀 늪에 발이 푹푹 빠지는 기분이 영 좋지만은 않았다. 둘러봐도 온통 흰 여섯 모 결정체들이 시야를 뒤덮는다. 하얗게 식어버린 대지. 바르바 분지는 나의 걸음에 차가운 미소만을 흘릴 따름이었다.
잔뜩 벌개진 코와 입에선 굴뚝의 연기처럼 내리 뜨거운 입김을 뿜어댔다. 작게 치켜뜬 나의 좁은 시야에서도 드문드문 포착되는 물체들. 나의 투박한 발소리에 후다닥 꽁무니를 빼는 검은 피시스 여우였다. 휙 하고 찬 바람에 실려오는 순록의 처량한 우짖음이 귓가에 맴돈다.
뽀얀 눈보라가 먼지처럼 일어선 나의 코트를 온통 흰 빛으로 덮었다. 얼어버린 알갱이 하나 하나는 제각기 달을 품어선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얼어붙은 달조각이 산개하여 조용히 포개어지듯.
전나무 몇 그루가 드문 드문 눈에 보였다. 지독히도 하얀 병마에 총천연의 새파란 빛을 머금은 올곧은 전나무였다. 나무의 희미한 원기를 향해 발을 붙이니 몰아오던 하얀 바람은 점점 꺼져갔다. 눈을 머금은 바람을 대신하여 나를 맞은 것은 얼어붙은 강 한 줄기였다.
강의 얼음판은 생각 외로 단단했다. 적어도 나보다 몸무게가 훨씬 웃돌 검은 버팔로가 강 위에 서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하면 깃털 같은 나 하나 얹는다 하여 맥없이 주저앉을 걱정은 없었다. 등에 동여맨 기다랗게 치솟은 낚싯대를 손에 쥐곤 사정없이 발을 끌었다.
낚싯대를 매곤 자리를 떡 잡고 앉아보니 예기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수백년의 세월을 달려 한 곳의 자리만을 지켜온 강이 이방인의 방문을 허락치 않았다. 즉, 얼어붙은 강을 암만 내리쳐도 얼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작은 균열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낚싯대를 집어던지곤 무심한 강만을 하염없이 째려봤다.
쾅 -
얼어붙은 강줄기를 타고 나의 발 밑까지 전해지는 묵직한 느낌.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진동이 타고왔던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음판 위에선 집채만한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굉음을 냈던 그림자의 덩치는 버팔로, 아니 그보다도 조금 컸다. 팔다리가 온전히 사람처럼 붙어있는 그림자는 하얀 털로 장식된 가죽쪼가리를 덧대고 있었다. 머리 위엔 암색의 짧게 친 뾰족한 털자락이 뻬곡히 박혀있었다. 우악스런 손에는 작은 나무 한 그루 크기의 낚싯대를 쥐곤 쭈그려앉아 얼음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설원의 맹주, 자이언트 족이었다.
호들갑스런 나의 인기척을 눈치챈 듯 자이언트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반가운 마음에 낚시는 뒷전으로 미루고 자이언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뗐다.
"뭐야, 인간이잖아?"
육중한 덩치와는 달리 너무나도 앳된 목소리에 순간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회색의 흙빛과도 같은 얼굴색의 자이언트는 볼에 젖살이 두툼히 붙어 있었다. 매처럼 생긴 눈알을 굴리던 자이언트는 나의 행색을 보고는 넌저시 운을 떼었다.
"얼음 낚시를 하기 위해 찾아온 인간인가?"
외형과는 달리 순진한 질문에 나 또한 맞장구를 쳐주었다. 단단한 얼음 덕에 낚시가 어렵다는 설명을 해보이자 자이언트는 쭈그렸던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그리고는 손으로 가슴을 탕탕 치곤 커다랗게 외쳤다.
"역시 인간은 나약하군. 얼음을 깨줄 테니 이 곳에서 낚시를 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느껴지는 좀 전과 같은 진동. 누구는 돌부리로 내리 찍어도 깨지지 않던 얼음이 발을 한번 구르자 쩍 하고 갈라지는 게 아닌가. 너무나도 덧없이 하얀 얼음이 주저앉자 새파란 속살이 제 모습을 보였다.
본디 꾼들이 모이면 대화의 물꼬가 탁 트이기 마련이다. 이는 이종족간의 벽이란 것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구스타프. 이것이 나의 이름이며, 올해로 열 두살이 되어간다."
이 무뚝뚝한 자이언트 구스타프의 나이가 생각보다 어림에 당황이 앞섰다. 어느새 구스타프의 찌가 물결을 세차게 가르더니 뽀얀 빙어가 펄떡이며 나왔다. 기분이 좋은듯 흥얼거리며 능숙한 손매로 빙어를 작은 통에 거침없이 던져넣는다.
건조한 표정에 미묘한 미소가 번지던 구스타프. 설원 속에서 힘겹게 자라나는 전나무와 같이 그의 미소에는 표독한 그 무엇이 존재했다. 화제를 돌려 구스타프에게 어째서 낚시를 하고 있느냐며 질문을 던졌다. 구스타프는 투박한 톤으로 당연한 듯 내 질문을 손쉽게 제압했다.
"자이언트도 먹어야 살지. 우리는 열 살을 넘기면 스스로 자립의 능력을 길러야한다."
참으로 매몰찬 종족이였다.
비단 저 나이 땐 또래들과 버팔로처럼 거칠게 뛰놀고 싶은 것이 당연하거늘. 안스러운 나의 심정을 알기나 아는지 구스타프는 내내 물고기만을 잡아챘다. 매서운 북풍이 스쳐가는 그의 코 주위에는 듬성듬성 암빛의 잔뿌리가 보였다.
상념에 빠진 틈을 타 작은 구멍에 담긴 나의 찌가 물살을 가르며 움직이고 있었다. 어영부영 대를 잡고 세차게 당겼지만 눈 앞엔 떡밥만 사라진 바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내자빠져 있는 나의 모습에 구스타프의 입가가 씰룩거리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풋-, 인간은 낚시 기술도 형편없군."
일순 이종족이 인간을 비하하는 말에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솟아오르는 굴욕감에 휘둘려 나도 모르게 열심히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번번히 나의 해명에 말꼬리를 부여잡고 떼를 쓰는 구스타프의 태도에 비로소 아이처럼 느껴졌다. 아직 덜 익은 사과처럼 속은 인간의 같은 또래와 같은 순수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점점 익어가는 그의 모습에 괜시리 아쉬움이 다가왔다.
따스한 햇볕이 조심스레 어깨를 감쌌다. 얼음 구멍은 이제 조그만 틈만을 남기며 서서히 봉합되기 시작했다. 빙어 대여섯을 담은 나와는 달리 구스타프의 통에는 빙어가 그득히 은빛 물결을 이루었다.
"이쯤이면 물고기는 충분하군. 나는 마을로 돌아가겠다. 낚시를 계속 할 텐가?"
고개를 저은 나를 보며 구스타프는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전나무와 같이 희미한 미소가 아닌, 녹아버린 강과 같은 시원한 웃음이였다.
"나는 삼하인 밤마다 이곳에서 낚시를 한다. 원한다면 그 때 얼음 낚시를 해라. 얼음을 깨줄테니."
말투는 퉁명스럽지만 무언가 떼를 쓰고싶은 분위기가 흠뻑 묻어나는 그였다. 꼭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약조를 내게서 받아낸 그는 만족스런 눈빛을 품으며 서쪽으로 사라졌다.
그의 사라짐과 동시에 물가의 구멍도 언제 그랬냐는 듯 완벽히 메꾸어졌다. 퉁명스러운 강줄기는 모진 추위에 무장해 단단한 얼음 갑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염없이 내려봤지만 얼음은 여전히 깨지지 않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멈춘 듯 보이는 저 얼어붙은 강은 쉬지않고 아래에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겉으로는 강인하고 투박해도 속은 누구보다 부드럽고 순진하다는 사실을.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자이언트, 구스타프는 얼어붙은 강과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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