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전 87기. 노련한 전사를 향한 트레보의 수련기(About Trefor 86)


    -트레보. 자네가 내 밑에서 무술을 수련한 것도 꽤 오래 된 것 같은데... 이제 내 자네에게 가르쳐줄 것은 얼추 모두 가르쳐 준 것 같네. 다른 사람들처럼 이 마을을 떠나 견문을 넓히는 것이 어떻겠나?

    제가 아직 레이널드 선생님 밑에서 수련을 쌓고 있었을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저런 말씀을 하셨지요. 저는 서둘러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스승님.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스승님처럼 노련한 전사가 되는 것이 저의 꿈. 그 꿈을 이루기 전에 이 마을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부심 높은 티르 코네일의 전사로서 고향의 이름에 누가 될 뿐입니다.

    -흠... 어쩐지, 자네, 이 마을에 남고 싶어하는 것 같군. 허허...
    자네가 이야기한 이유가 전부인가?

    아아, 날카로우신 스승님.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스승님은 그런 저를 지그시 내려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런 이야기에 얼굴이 빨개지다니... 후후후...
    이 마을에 남아 나를 돕기 원한다면, 자네에게 한 가지 수련을 제안하겠네. 인벤토리를 달걀로 모두 채운 채 싸워서 한 번도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나?

    -인벤토리를 달걀로 전부요...? 세상에, 스승님,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인벤토리에 달걀이 전부 들어가면 무려 예순 개... 계란이 두 판이라구요! 그런 걸 몸에 지니고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흠... 아직 자네에게 그런 정도까지는 무리겠군. 그렇다면 달걀을 하나로 줄여 주지. 넘어져서 깨지는 것은 하나든 예순 개든 마찬가지니까...

    -하하, 네. 그런 정도라면 자신 있습니다.

    -...자네는 중요한 것을 잊고 있군... 트레보. 달걀이 몇 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대와 싸우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나?

    -...그... 그것은...

    -자네가 싸울 상대는 라비 던전의 보스 방에 있다네. 단, 주의사항이 있네. 반드시 혼자 들어가서 상대하게. 다른 사람의 힘을 빈다면 실격이야.


    그렇게 저는 라비 던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몸에 달걀을 지닌 채로 말이지요. 처음에는 보스 정도는 금방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선생님 말씀대로 라비 던전의 보스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사람들에게 물어봤었거든요. 하지만 묻는 사람들마다 모르겠다고 하거나 뭔가 야릇한 웃음을 짓더군요.

    게다가, 보스를 만나기는 커녕, 던전 근처에서 미믹을 상대하는 것도 꽤 어려웠습니다. 서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어두운 던전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스켈레톤이나 해골늑대는 꽤나 힘겨운 상대였고, 때때로 제가 제일 싫어하는 쥐가 튀어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실수로 가지고 있어야 할 달걀을 제단에 바친 적도 있었죠.

    저는 그제서야 눈치를 챌 수 있었습니다. 라비 던전의 보스방까지 가는 길에 만나는 수많은 몬스터들을 단 한 번도 쓰러지지 않고 헤쳐나가 보스를 쓰러뜨리라는 것이 스승님께서 제게 주신 과제였던 것이었지요.

    스승님의 깊은 뜻을 늦게 파악한 감이 있긴 했습니다만, 과제의 의미를 파악한 이상 트레보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드디어 달걀을 품은 채로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채로 라비 던전의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제가 본 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검은 옷의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자태는 너무나도 고혹적이었습니다. 그녀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제게 말을 걸자 저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해 둘 것은, 그런 그녀도 저 마을 북쪽에 사는 힐러 딜리스양만큼은 아름답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의 고질병...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는 힘을 잃고 마는 성품 때문에 저는 던전을 나올 때마다 깨진 달걀에 주머니가 젖어 어기적대며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여든 여섯 번. 저는 그 검은 옷의 여성이 서큐버스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스승님께 찾아가 하소연했습니다.

    -스승님. 주신 과제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제가 서큐버스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스승님께서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스킬을 바꾸는 데 주저함이 있어선 안 되네. 자신의 스킬을 정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고집해선 안 되고, 상대방의 스킬이 무엇인가를 빨리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네...

    -...말씀이 너무 어렵습니다.

    -...

    긴 침묵을 깨고 레이널드 선생님께서 무언가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마을 북쪽의 힐러, 딜리스양이 자네에게 전해주라고 한 황금 달걀일세.
    ...이봐, 먹지는 말라구. 이것을 들고 그녀가 자네를 생각하는 마음을 잊지 말게.

    저는 감격했습니다. 한때나마 서큐버스 같은 몬스터의 아름다움에 홀려 저의 태양이자 여신인 딜리스양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었을 법한 황금 달걀을 품 속에 고이 품고 저는 용기백배해서 라비 던전으로 달려갔습니다.


    바로 그 날, 저는 스승님의 가르침과 딜리스양이 준 황금 달걀의 힘으로 라비 던전을 한 번도 쓰러지지 않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보스인 서큐버스가 예의 그 고혹적인 미모로 제 눈을 현혹시키려 했지만 딜리스양에 대한 제 사랑을 이겨낼 수는 없었지요.

    저는 한 사람의 노련한 전사의 자격으로 그녀에게 달려가 청혼을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녀는 제게 그런 비싼 물건을 줄 리가 없지 않느냐며 문전박대를 하더군요. 스승님께서는 제게 거짓말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제 무술실력을 향상시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여성 앞에만 서면 말을 더듬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제 성격을 고쳐주시려 했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비록, 딜리스양이 주었다는 황금달걀은 거짓말이었지만, 그 뒤로 스승님께서는 저를 한 사람의 노련한 전사로 대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큐버스를 쓰러뜨리고 던전을 나왔을 때, 자신의 소지품 중 황금달걀이 깨지지 않고 그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당신 역시 노련한 전사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 말을 더듬는 버릇 같은 것도 꽤 많이 떨쳐내버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심신의 평정을 조화롭게 이룬 전사의 길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노련한 전사의 길에 눈뜨고 싶으시다면, 당신께도 황금달걀을 이용한 수련법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이성이 황금달걀을 선물한다면 그 이상 가는 방법은 없겠지요.

    저는 그 뒤로 황금 달걀은 물론이고, 머리에 물병을 이고 라비 던전을 공략하는데 수십차례 성공했습니다. 제가 라비 던전을 그런 식으로 공략하는 횟수를 센 마을 사람들은 그런 저를 가리켜 다운월드 공략의 달인, 트레보 86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