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인의 소년(The Boy of Samhain)

    울레이드 벌목캠프에서 꽤 떨어진, 그렇다고 던바튼에 가깝지도 않은 곳에, 삼하인, 그 날이 되면 항상 소년은 캠프파이어 준비를 했다.
    새 것마냥 반들거리는 도끼, 그러나 조금 험하게 다루었는지 흠집이 나 있는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는 소년을 사람들은 항상 삼하인의 아이라고 불렀다.

    팔라라가 지고, 이웨카와 라데카가 뜨기 시작할 때, 주위에 신비한 마나가 감돌기 시작할 때-
    삼하인, 그 때 소년은 항상 똑같은 그 자리에서, 캠프파이어 준비를 했다-

    그리고, 팔라라가 뜰 때까지, 소년은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캠프파이어를 바라보며, 장작에 붙은 불이 사그라들면 준비된 장작을 넣어 불길이 다시 살아나게 할 뿐.
    그리고, 팔라라가 뜰 때가 가까워 오면-

    소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는 캠프파이어의 흔적이 보일 뿐.

    삼하인 밤만 되면, 여행자들은 소년이 피워 놓은 캠프파이어 주위에 몰려 앉아 사연 이야기며, 모험 이야기며, 고향 이야기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또, 각자가 악기를 꺼내 들어 좋아하는 노래며 여러 노래를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년과 캠프파이어를 함께했던 여행자들은, 그 아이가 왜 삼하인만 되면 캠프파이어 준비를 하는 지 몰랐다.
    웬만해서 소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캠프파이어 근처에 몰려 앉은 사람들과 동물들에게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 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어쩌다가 누가 사연을 묻기라도 하면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삼하인이 찾아왔다.
    팔라라는 이제 져 오고, 저 멀리서 이웨카와 라데카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푸른 달 이웨카,붉은 달 라데카.
    에린을 비춰주는 신비로운 불빛.
    팔라라는 저 끝에 사라져가지.
    이웨카와 라데카의 아름다움에 울며.
    팔라라는 저 끝에 사라져가지.
    이웨카와 라데카의 아름다움에 울며.."

    "저기 리아라, 저 아이 말야-"
    "아, 삼하인의 아이구나."

    검푸른 로브에, 로브에 어울리는 푸른색 류트를 든 소녀가, 멀리서 어렴풋이 보이는, 장작을 패는 소년을 바라보며 반가운 듯이 말했다.

    "..삼하인의 아이?"

    가벼워 보이는 여행자 차림에, 손에 단검을 든 소녀가 갸우뚱,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류트를 들고 있던 리아라라는 소녀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루디아는 아직 저 아이에 대한 소문을 못 들었구나? 삼하인의 아이야, 항상 삼하인, 이웨카가 뜰 때가 되면 저 자리에서 캠프파이어 준비를 하더라구. 이유는 모르겠지만.. 항상 저 자리에 있더라구. 마침 팔라라도 져 가네, 자아, 루디아!잠깐 저 아이의 캠프파이어에서 쉬어 가자,응?"

    리아라가 이끌자, 당황한 루디아는 리아라에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가는 것을 싫어할지도 모르잖아?"
    "아니야, 저 아이는 사람이 모이는 것을 좋아하는걸? 나도 몇 번 쉬어 갔었고. 루디아, 가자, 응? 저 아이도 혼자면 쓸쓸할 텐데. 요즈음 사람들이 던바튼 쪽으로 별로 오질 않아 쓸쓸한 모양이더라구."

    '쓸쓸하다'라는 말에 왠지 연민이 생긴 루디아는, 리아라의 뒤를 따랐다.
    삼하인의 소년에 대해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왠지, 장작을 혼자 나르고 불을 지피는 소년의 뒷모습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기 때문에, 루디아는 그런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수도 없었다.

    "잠깐 쉬었다 가도 될까요?"

    리아라가 소년에게 양해를 구하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덮어쓴 로브 사이로 보이는 밤보다 더 깊은 칠흑색의 머리칼과. 순수해 보이는 붉은 눈동자를 지닌 소년이었다.

    "저 애..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지?"

    소년에게 들리지 않게, 루디아는 리아라에게 속삭였다.

    "말을 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할 뿐이야. 괜찮아."

    리아라가 확신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속삭이자, 왠지 안심이 되는 루디아였다.

    "..."

    소년은 말 없이 불길을 바라보았다.
    불길 위로 타닥타닥 소리에 맞춰, 흩날리는 불가루들. 조그마한 불꽃들, 소년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말없는 소년 사이에서, 루디아와 리아라, 둘은 더욱 더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누가 분위기 메이커를 해줘야 하는데. 이런 어색한 기분에는, 역시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어색한 기분에 말을 잘못 한다던지 화제를 잘못 돌린다던지 하면, 더욱 더 어색한 기분이 된다는 것은 말할 이유도 없겠지만.

    "-모험자들은 역시 같이 있기만 해도 편안하네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을 꺼내지 않는다는 소년이 입을 열었다.
    루디아는 순간 놀랐다. 고작 열네어살 되어 보이는 소년의 목소리가, 신비로운 분위기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두 분을 보니까 예전에 친구랑 여행했던 일도 생각나고요."
    "..여행?"
    "이젠 왜 해야 되는지조차 몰라서 관뒀지만요."

    소년은 캠프파이어에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사람들은 잘 말린 장작을 쓰라고들 하지만, 갓 자른 장작도 나쁘지는 않다. 불길이 좀 죽기는 하지만. 갓 자른 장작치고는 초심이 좋다.
    장작에 불이 붙어, 불이 타오른다.
    불길 위로 넘실넘실 피어오르는 조그마한 불꽃들.
    불꽃들은 어느새 밤바람 사이로, 이웨카가 떠오른 하늘 위로 사라진다.

    "별이 멀리 있어서 손이 닿지 않는다면- 손에 닿을 정도로 별을 가깝게 보고 싶다면, 캠프파이어를 하면 되니까."

    불꽃의 넘실거림에 반쯤 홀려, 눈을 희미하게 뜬 채, 그 아이가 말했었다.
    그래, 그 아이가 말했었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소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함께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그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널 지켜줄테니까-'
    '아마리에같은 여자아이에게 내가 보호받는다면 창피한 일인걸?'
    '걱정 마셔,난 널 지킬 정도의 힘이 있으니까'

    널 지킬 정도의...

    힘이 있으니까..

    힘이 있으니까..

    힘이 있으니까..

    그 아이의 목소리가 쟁쟁거리며 귀에 울리는 것만 같다.
    그래, 그 한 마디의 맹세, 결국 지키지도 못했지만.

    괜시리 씁쓸해져서, 소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을 후회했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어쩌랴.

    불길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자, 소년은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불길이 타올랐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소년의 마음처럼,슬프게만 들린다.

    루디아와 리아라는 그런 소년을 지켜보았다.
    잠시 동안 소년의 얼굴에서 씁쓸함과 슬픔을 읽었기 때문에.

    또 다시 어색한 분위기다.
    리아라는 류트를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어색한 분위기를 사그라뜨릴 수 있다면,

    "푸른 달 이웨카, 붉은 달 라데카.
    에린을 비춰주는 신비로운 불빛.
    팔라라는 저 끝으로 사라져가지.
    이웨카와 라데카의 아름다움에 울며.

    팔라라는 저 끝으로 사라져가지.
    이웨카와 라데카의 아름다움에 울며..
    푸른 달 이웨카
    붉은 달 라데카
    둘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은
    팔라라마저 울며,저 끝으로 사라져가게 하지

    팔라라가 흘린 그 눈물은,
    그 눈물은 별들이 되었네.
    이웨카와 라데카 곁에서
    반짝이는 그 별들이..."

    리아라가 부르는, 흥겨우면서도 어딘가 슬픈 곡조의 노래를 들은 소년은, 불길만 바라보던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붉은 눈으로 리아라와 루디아를 바라보았다.

    "..여행을 할 때, 힘들고 피곤하고 집이 그리울 때마다, 그 노래를 부르며 위안을 찾으시나요?"

    진지하게 소년이 물었기에, 리아라도 진지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항상 이 노래를 불러요.내가 살던 마을에서 자주 들었던 노래니까요."
    "힘들 때 위안이 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 행복한 거죠. 저에게는, 이 캠프파이어가 위안일까요. 삼하인.. 그 날만 되면 전 아픈 추억이 떠오르게 되지요. 그래서.. 그것을 불태우기 위해서, 캠프파이어를 하는 거예요. 그 기억을 불태우기 위해서.."

    루디아는 소년의 말에 담긴 뜻을 알 것 같았다.
    그 일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잊어버리는 것은 슬프기에, 그러기에, 삼하인마다 불꽃을 피우며, 추억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소년의 말 속에 담긴 뜻이었다.
    루디아가 자신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기에, 과연 이것이 맞는 답인지는 모른다.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해도, 루디아는 소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웨카와 라데카가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소년은 말했다.

    "모험을 동경하던 어린 시절이었죠.

    그 때, 저랑 함께했던 한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는 항상 저를 지켜주겠다고 말했죠.
    나를 지킬 만큼의 힘은 있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널 지켜주겠다고. 그 아이는 항상 그렇게 말했어요. 빙긋이 웃으면서.항상 말했죠-

    그리고, 동경하던 모험을 하는 때가 되었죠. 우리가 모험을 시작한 날은.. 삼하인, 그 날이었어요.

    우리가 살던 곳에서는, 아이들이 아홉 살이 되는 해에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죠. 그 이유가, 9는 모든 숫자의 끝이며, 새로운 것이 되기 때문이래요..

    우리가 아홉 살이 되던 날, 그리고 그 날 삼하인.
    그 때 우리는 여행을 시작했어요.
    마을 전통으로써 마을 장로님에게 나무를 깎아 만든 목걸이를 받고 말이죠.

    그래요, 그 때,그 때의 기분은 아직도 생각나요.
    짐은 무거웠지만 발걸음만은 경쾌하고 가벼웠죠.
    그 아이 얼굴이 아직도 생각나요, 활기차게 웃으며,그 때도 저에게 말했죠.
    항상 너를 지켜줄게-라고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고.

    그래서 나는 그 아이를 지키도록 마음먹었죠.
    솔직히, 그 땐 남자로써 여자아이에게 보호받는 것이 부끄러워서 단순히 그런 거지만요.

    ..그런데 몇 년쯤 전에, 그 아이는.. 사고로 영혼들의 세계로 가 버렸어요.
    더 이상 저에게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더 이상.."

    불꽃이 조금 사그라드는 것을 본 소년은, 장작 몇 개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넘실거리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항상 삼하인에 불꽃을 피웠어요. 그저, 삼하인, 그 때에 있었던 여행의 첫 마음을 되새기자는 생각에서, 또 가족들을 떠올리기도 했고..집이 그리울 때마다 불꽃은 위안이 되었어요.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삼하인에는 불꽃을 피우며 위안을 찾고, 즐거워했지요."

    소년은 말을 잠시 끊었다.
    그리고는, 불가루가 하늘로 흩날리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아인 항상 이렇게 말했지요. 별이 멀리 있어서 손이 닿지 않는다면- 손에 닿을 정도로 별을 가깝게 보고 싶다면, 캠프파이어를 하면 되니까-라고요. 아마, 이 불가루를 보고 한 말일 거예요.사실이거든요,별과도 같으니까.."

    소년이 말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서, 삼하인에 불꽃을 피우는 것인가요?"
    "으음, 아까 말했듯이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캠프파이어를 하는지도 모르지요. 캠프파이어의 장작이 타듯, 제 기억도 불에 타는 장작같이 새까맣게 태워 버리려고.
    그런데, 캠프파이어로도 태울 수 없는 기억이라니, 이상하지요. 추억이라고는 말하기 싫어요.
    그리고.. 이제서야 겨우 한 가지를 알아냈어요. 제가 여행의 목적을 왜 잃어버렸는지. 여행의 목적을 찾는 대신, 전 제가 왜 추억을 버리지 못하는지에 대한 목적을 찾기로 했죠. 그걸 찾을 때까진, 여행은 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고향에도 돌아가지 않을 거구요.
    당분간 여기에 머물면서,왜 추억을 버리지 못하는지에 대한 목적을 찾을 거예요.
    그 아이랑 첫 번째로 불꽃을 피웠던 이 장소에서.."

    소년이 불꽃에서 시선을 떼고, 멀리 어렴풋이 다가오는 새벽녘을 바라보며 말을 마쳤다.
    저 끝에서, 어렴풋이 새벽녘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팔라라가 떠 오고 있었다.
    팔라라의 밝은 광채가 어스름 사이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밤이 새는지도 모르고,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리아라가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리아라의 옆에서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루디아도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너무 많이 이야기를 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다음 삼하인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삼하인의 소년,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밝은 미소, 팔라라보다 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에?"

    어느새 멀어져 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디아가 중얼거렸다.

    "..이번 삼하인의 밤은.. 무언가에 홀린 기분인걸.."
    "그러게 말이야.."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들은 무언가에 홀린 기분으로, 소년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삼하인의 소년, 그는 던바튼 근방의 모험자들에게 꽤나 알려진 소년이다.
    그 소년이 왜 삼하인에 아마,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삼하인의 소년, 그의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여러 모습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단 한 개 뿐-
    그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어쩌면 밝혀진 때까지도,
    삼하인의 소년, 그의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여러 모습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울레이드 벌목캠프에서 꽤 떨어진, 그렇다고 던바튼에 가깝지도 않은 곳에, 삼하인, 그 날이 되면 항상 소년은 캠프파이어 준비를 했다.
    새 것마냥 반들거리는 도끼, 그러나 조금 험하게 다루었는지 흠집이 나 있는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는 소년을 사람들은 항상 삼하인의 아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