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사과 나무 한 그루
누가 하늘에다 저렇게 맑은 푸른색 물감을 풀어 놓은 것일까. 하늘은 한없이 푸르렀고 그 위에 동동 떠다니는 구름조차 푸르러 보였다. 해는 자신의 몸이 하얗게 될 때까지 불을 질러버리겠다는 의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맑은 날을 기뻐하는 새들의 춤이 이어졌다. 양들 또한 아직 젖어 있긴 하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생풀을 한가로이 뜯고 있었고, 나는 버릇없는 양치기 녀석의 눈길을 피해 양들 사이에 누워있었다. 풀이 젖어 있기 때문에 옷이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일주일만에 찾아온 맑은 날에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을 보지 못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옷이 젖는 것 따위에 상관없이 누워 있었다.
양치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입고 온 풀빛나는 로브가 축축했다. 완벽하게 숨기 위해서 얼굴 위로 덮어놓은 풀빛의 모자에 빗물이 툭, 하고 떨어지자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모자를 살짝 치워보았다. 아마도 나뭇잎에 붙어서 숨을 죽이던 빗방울 하나가 기어코 떨어져버린 모양이다. 하늘을 보니, 예전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늘과 바다는 똑같이 파란색이야. 재미있지 않아? 서로 떨어져있는데, 둘은 같은 색이니까 말야."
그 때 나의 대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 때의 나의 대답을 떠올리니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배어나왔다. 한심하기 짝이 없게도, 나는 과학 이론에 입각한 멍청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그녀에게 핀잔을 주었었다.
"바보. 하늘은 빛의 산란, 바다는 빛의 반사 때문에 푸른 빛이 난다구. 같은 색이 아냐."
그녀는 내 말을 듣고 혀를 쏙 내밀며 사과 나무를 세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기할 정도로 운이 나빴기 때문에, 언제나 사과를 따 먹을 때에는 나의 도움이 필요했었다. 내가 사과나무를 한 번 발로 톡 차면 언제나 사과가 떨어졌었는데, 그녀는 그럴 때마다 잽싸게 떨어지는 사과를 낚아채며 나에게 배시시 웃어보이곤 했다. 나는 그녀의 그 미소가 좋았다. 또, 그녀가 상큼하게 아삭아삭 깨물어 먹는 사과도 좋아했다.
"할 일 없이 양들 사이에 숨어 낮잠을 자고 있는 그대는 누구요~"
그녀의 산뜻한 목소리였다. 양치기소년 데미안은 항상 나를 찾아 내지 못했지만, 신기하게도 그녀만은 내가 어떤 변장을 하고 있어도 귀신같이 나를 찾아내었다. 나는 모자를 손에 쥐고 살며시 일어났다. 데미안은 나를 보고 경악한 표정으로 바락바락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아저씨이! 또 그러고 계셨어요? 양들이 싫어한단 말이에요!"
"어떤 양이 날 싫어해. 너의 그 고함을 더 싫어할 거다 이 녀석아. 그리고 아저씨라니? 내가 그렇게 나이들어 보여?"
"흥! 매일 하는 일도 없이 낮잠만 자는 사람이 아저씨가 아니고 뭐예요?"
"뭐어?"
내가 성질을 내려 하자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팔짱을 끼며 그냥 가자는 듯이 눈웃음 쳤다. 아무리 화가 나있어도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모든 화가 풀려버리곤 했다. 나는 데미안에게 흥! 하는 소리를 내주고는 그녀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데미안이 베에- 하는 소리를 내며 혀를 쭉 뻗는 느낌이 났지만, 뭐 어떠랴. 그녀가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데.
"헤헷. 오늘도 데미안이랑 싸우는거야?"
"싸우긴, 어린애랑."
"어린애는. 너도 어린애잖아."
"엥? 내가 왜 어린애야. 난 분명 재작년에 성인식을 치른..."
"그래도 내 눈에는 꼬맹이인걸~"
"너어..."
그녀가 까르르 웃는다. 나는 하릴없이 피식 웃으며 그녀와 살짝살짝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초록색 허브들이 인간에 의해서 정리되지 않은 채 널부러져 있는 모습을 보며 허브들 사이사이로 피해 걸었다. 이럴 때 그녀는 초록색 허브들 사이에 피어있는 한 송이의 보랏빛 제비꽃 같았다. 나는 그 보랏빛 향기에 이끌려 하루에도 일곱 번은 현실과 꿈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느라 이미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구별이 안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후유증 없는 마약과 같았다.
"아~ 사과 먹고 싶어라."
"사과? 하지만 이 곳은 티르코네일인걸. 티르코네일에는 사과 나무가 없으니 사과가 먹고 싶으면 던바튼으로 가거나 식료품점으로 가야지."
내 말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아니야. 식료품점에서 사먹는 사과는 죽은 사과란 말야. 난 살아있는 사과를 먹고 싶어."
"사과가 죽은 것도 있고 산 것도 있냐? 뭐 그렇게 살아있는 사과를 먹고 싶다면 던바튼으로 가자."
나는 습관적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문게이트가 열릴 때까지, 다시 말해 달이 뜰 때까지는 아직 한참은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작게 한숨을 폭 쉬더니 조근조근 나에게 말했다.
"사과 나무는 티르코네일에도 있어. 가자."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티르코네일에도 사과 나무가 있나? 한 번도 못봤는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손에 느껴지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의 느낌 때문에 그런 쓸모 없는 생각 따위는 날려버렸다.
그녀가 데려온 곳에는 정말 생전 처음보는 사과 나무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항상 지나다니는, 키아 던전 가는 길목에 있었다.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는 매일 지나다니는 곳인데... 한 번도 못봤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어떤 표지판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무 옆에 박혀서 나무만큼이나 연륜을 뽐내고 있는 낡은 표지판이었다. 표지판에는 너무 낡아 읽기도 힘든 흐린 글씨로 한 문장 쓰여있었다.
' 오픈 베타 기념 식수 '
"어떤 기록에 의하면, 이 나무는 이 세계가 열린 바로 그 날 자라난 나무라고들 해."
그녀가 표지판을 보고 있는 나를 보며 조근조근한 말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런 목소리로 말하고 있을 때의 그녀는 마치 이 세상에서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는 성녀 같았다.
"처음 이 세상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사과 나무를 정성껏 가꾸어 주었다고 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점차 이 나무에 대해서 무관심해졌다고 해. 오직 사람들의 관심은, 이 나무를 지나쳐서 보이는 저기 키아 던전에만 집중되었다고 하지. 그리고 그 현상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심해졌다고 해. 그리고 지금은 이 나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정말 얼마 없어. 왜 그럴까? 사람들은 점차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 하기 때문일 거야. 그리고."
그녀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다 보니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내가 그녀가 말을 멈췄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그녀가 사과 나무에 다가가 나무를 살짝살짝 흔들고 있었다. 아무리 운이 좋지 않은 그녀라고 해도, 저토록 인자하고 연륜있어 보이는 사과 나무의 축복은 내려 받을 수 있나 보다. 사과 한 개가 떨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는 배시시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이렇게 맛있는 사과를 맛보지 못할 거야."
나는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에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꽈악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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