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아주 거대했고, 슬프리만큼 아름다웠다. 소녀는 꽁꽁 얼어붙은, 기둥 같은 시체 앞에서 멀거니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래 먼지에 뒤덮인 새하얀 빛깔의 어둠은, 여자아이에게는 경이감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하게 거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그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도화지에 그 석상을 재빨리 그려내기 시작했다. 무엇일까. 그 거인에게서는 묘한 슬픔이 전해져 온다. 소녀는 스케치를 다 한 후에도 석상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모래 바람이 불어 그녀의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소녀의 긴 속눈썹이 그 새파란 눈을 덮으며 스르르 잠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소녀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거인을 올려다 보았다.
아까까지는 분명히 손을 조금 위로 올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손이 아래로 내려와 땅을 짚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긴 귀를 쫑긋거리며, 석상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쿡, 하고 석상을 건드렸다. 거인의 손이 간지러운 듯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자, 소녀는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살아있군요!"
모래바람이 부는 라노.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명체. 거인은 석상인 양 우두커니 서 있었으면서도, 끄덕끄덕 하고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소녀에게는 신기할 뿐이었다. 더불어 거대한 그 사람은 말까지 했다.
"아가씨,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요."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고, 거인은 그것을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래가 잔뜩 묻은 손을 가볍게 털어냈다. 그 바람에 먼지가 일었고, 소녀는 평소에 라노의 모래 폭풍에 익숙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채기를 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먼지 바람이었다.
"왜요?"
거인은 모래를 털어낸 손으로, 여자아이의 금발을 곱게 쓰다듬었다. 힘만 주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연약한 머리카락과 몸이었다. 가냘픈 턱선을 따라 고운 머리카락이 물처럼 흘러내렸고, 사막 엘프답지 않게 새하얀 얼굴에는 홍조가 옅게 드리워져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은 마치 제가 모래라도 되는 것마냥 어지럽게 모래바람을 따라 춤을 춘다. 눈이 부시다.
"정말 석상이 되어버릴 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아가씨 앞에서만 움직이는 거예요. 아가씨가 너무 순수해서, 나는 생명을 얻었어요."
그 이야기에 감회받은 듯, 소녀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활짝 웃었다. 분홍빛 입술 아래로 가지런한 치아가 예쁘게 드러났다. 거인은 그 소녀 엘프가 자신의 이야기를 믿는 듯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엘프 마을, 필리아에 들어온 지는 거진 한 달이 다 되었다. 삼하인에 몰래 엘프 전사들의 눈을 피해 들어와, 임볼릭의 셋째 날까지 버티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래바람이 잔뜩 불어서 몸을 덮었고, 웬만한 엘프 전사들은 그런 곳에 거인의 석상이 있었나, 싶다가도 요새 들어 밀레시안들이 자꾸 몰려드는 상황에 초보 엘프들이 발견했겠지, 하고 넘어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몰래 엘프 마을에 잠입하는 것은 성공했고, 조금씩 눈치채지 못하게 자리를 옮겨가며 몇몇 엘프 전사들을 죽여 놓기도 했건만, 이제 마을 가까이로 많이 다가오니 덜컥 겁이 나는 거였다. 그 수많은 엘프 전사들에게 들켰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난데없이 석상이 일어나 도망가도 마이너스의 결과를 초래할 뿐이었다. 여기저기 서성거리는 엘프 전사들의 눈은 어디서건 번득이고 있었다.
"아저씨를 위해 내가 뭔가 해 드릴까요?"
소녀가 순진하게 물었다. 거인, 자이하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여자아이에게 들켜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이 소녀는 아무래도 자이언트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자이언트라는 말은 들어 봤어도 본 적은 한 번도 없을 테니, 눈앞에 있는 것이 석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겠지. 자이하드는 소녀가 뭔가를 해서 자신이 들켜 버리는 게 더욱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내 이름은 유키라예요. 아저씨는요?"
"내 이름은 자이하드예요."
유키라는 빙긋, 하고 또 웃음을 머금었다. 눈부셨다. 당찬 여자가 최고의 이상형이고, 차갑고 냉혹한 전사 여성이 미녀로 꼽히는 발레스에서와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물론 자이하드 자신도 강한 여자를 이상형이라고 항상 말해 왔건만, 이 소녀 앞에서는 왜 약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입을 막고 싶으면 죽이면 되었다. 엘프 같은 것은 이미 오랜 반목으로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되어 있었다. 실제로 자이하드 자신도 필리아에 들어와서 엘프 전사를 몇이고 죽였지만, 거의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잖은가. 그러나 이 유키라라는 소녀만큼은 설원에 핀 꽃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웠다. 더운 모래바람이 가볍게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노래를 해줄게요."
그리고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자이하드는 필요 없다고 외치고 싶었으나, 유키라는 제멋대로 노래를 시작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미성에, 거인은 굳어 버렸다. 그는 그렇게 예쁜 음악이란 걸 들은 적이 없었다. 발레스에서의 악사들은 타악기를 두드리며 알 수 없는 언어를 내뱉고 노래를 한다. 물론 그것은 신나고 흥겨웠다. 언제나 들을 때면 춤을 추고 브리흐네 위스키를 마주치며, 함께 노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인의 성대라는 것은 꽉 막히고 짧고 굵기 마련이어서, 아무리 자이언트의 여자라도 그런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그 오랜 사막에도 아침이 찾아왔네.
모래 언덕 위로 내빼는 석양의 그림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죽은 자의 원혼이 더운 대지 위를 걷는다.
아직 돌아가지 못한 영혼아!
우리는 그대들의 영을 추모하노니.
거인은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사도 그렇고 음색 자체도 음울하고 어두운 단조였지만, 그것은 유키라의 미성에 녹아들어 최고의 음악이 되었다. 자이언트도, 인간도, 그런 노래를 만들 수는 없었다. 오로지 그런 아름다운 음악은 엘프만의 것이다. 다만 태어날 적부터 차가운 빛깔을 가슴에 품고, 타자를 배척하는 그 마을의 특성상 즐거운 음악이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 멸망의 때를 가까이 둔 엘프들의 노래는 언제나 음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노래를 천상의 음악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엘프만의 능력이리라.
"옛날옛날 노래여요."
자이하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어두침침한 노래를 동요로 부르는 엘프들의 심리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음악성만큼은 인정하는 바였다.
"그럼 잘 있어요, 거인 아저씨. 내일 또 와서 노래를 불러 줄게요. 그리고 갑자기 생명을 얻게 돼서 많이 배고프실 텐데, 음식도 가져올게요."
"엘프들의 음식은 너무 작아서 꽤 많이 먹어야 할 텐데."
그녀는 생긋 웃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밝은 웃음. 그리고 유키라는 고개를 돌려 모래 사막을 달려갔다. 마을의 네모진 집들 사이로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까마득히 멀어졌다. 엘프의 발은 정말 빠르다. 활을 쓰는 일족이라서 그런지. 자이하드는 다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다시 석상이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엘프라는 것들은 전부 나쁜 놈들인 줄 알았는데, 전혀 엘프답지 않은 그 여자아이만큼은 도대체 손댈 수가 없겠다고. 그러나 자이하드는 엘프 전사 몇 명 죽인 것만으로 공을 세웠다고 발레스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물론 마을 가까이 오면 엘프들이 떼로 몰려들 테니 그것대로 두렵기는 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엘프들을 몇 마리씩 죽이다가, 결국 들켜 버리면 죽을 때까지 죽이다 장렬하게 전사하지, 뭐. 전사의 긍지라는 것이 있다. 설원에서부터 이 먼먼 사막까지 온 것은 죽을 각오가 아니고서는 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등에 꽂힌 메이스 둘을 천천히 손으로 더듬다가, 꽉 말아 쥐었다.
*
유키라는 매일 왔다. 그리고 매일 왔기 때문에, 자이하드는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마을 쪽으로 가야 엘프 전사 놈들을 몇 마리씩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할 수 있을 텐데, 여자아이가 매일매일 오니까 모래 먼지를 뒤집어 쓰고 그 자리에 계속 붙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일 텐데도, 유키라가 자신이 자이언트라는 사실을 몰랐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었다. 자이하드는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저씨, 새를 키워본 적이 있어요?"
"없지요. 아가씨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석상이었는걸요."
"그렇군요. 나는 새를 길러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새를 봤어요. 엘프를 지지하러 온 한 밀레시안이 만돌린을 튕기며 연주를 하는데, 새가 그 연주에 맞춰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데요. 그 새 이름이 카나리아래요. 나는 그 이후로 가끔, 그런 새를 기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사막에 새 같은 것은 없다. 이제 거의 말라가는 늪과도 같은 오아시스가 이 사막에서 마을이 존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이고, 이미 생명체 같은 것은 끈덕진 것이 아니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도태된다. 새처럼 연약하고 가냘픈 존재는 설원에서도, 사막에서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가 만약 카나리아를 기르게 되면, 카나리아가 내 노래에 맞춰 춤을 출까요?"
"그렇겠지요."
"아저씨는 어때요? 노래를 할 줄 알아요?"
자이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예쁜 미성을 가진 소녀 앞에서, 노래를 할 줄 안다고 할 자신이 없었다. 그의 굵고 투박한 목소리는 단지 타악기 같은 거친 음만을 낼 뿐이다.
"아저씨가 노래해 준다면, 내가 춤을 출 수 있을 텐데! 나는 카나리아가 되고 싶어요. 하늘을 날며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사막을 날기에 내 날개가 너무 약할까요?"
유키라는 하늘을 나는 것처럼 두 팔을 쫙 벌리고 자이하드의 앞에서 휙휙 돌아다녔다. 자이하드는 그 작은 생명체가 눈앞에서 어지럽게 돌아다니자, 어지럼증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소녀는 파닥거리며 그 자리에서 뛰어오르다, 다시 땅으로 내려앉았다. 유키라의 춤은 정말로 새 같아서, 자이하드는 꽤나 즐거워졌다.
"아니예요, 날개란 건 약하기 때문에 더 높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가벼움이 없다면 날개는 땅으로 내려앉아 버릴 테죠. 날 수조차 없을 거고요."
"그렇네요. 그럼 나는 하늘을 날 거예요. 그래서 바다도 초원도 건너서, 아주아주 먼 곳으로 날아가볼 거예요. '자유'라는 건 그런 거죠?"
자이하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힐끗 쳐다본 사막 위에 건설된 도시는, 금방이라도 퇴색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마을 가운데에 고여 있는 물은 이미 썩어가고 있고, 이제 그들은 그 물을 마시지 않는다. 우물을 지어 끌어낸 지하수를 마셨다. 그리고 오랜 자이언트와의 반목. 엘프는 스러진다. 거인들과 전투하기에, 그들은 너무 약한 존재였다. 죽어가는 것은 엘프 전사들이고, 생명체에게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물도 이제는 말라간다. 그러나 엘프들은 어머니의 땅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메모리얼 타워에 묶여 서로를 공유하면서,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유키라가 말하는 '자유'라는 것은, 사실 엘프라고 하기엔 너무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그들의 공유하는 생각들은 여전히 음울하고 붉었다. 거기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어린아이다운 천진성일지도 모르지만- 엘프답지는 않았다. 자이언트라고도 할 수 없고, 차라리 인간답다고나 할까. 자이하드는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긴 석상의 곁으로, 소녀 엘프가 다가왔다. 유키라는 슬픈 빛깔을 머금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분홍색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아저씨, 발레스로 돌아가세요."
뜻밖의 말에, 자이하드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유키라는 눈이 부시도록 미소를 지으며, 위험할 수도 있는 그 거인의 앞을 겁도 없이 지나쳤다. 그리고 부서지는 듯한 아름다움을 입가에 머금고, 날개를 펼쳤다. 사막 위를 종종 달려, 자신의 마을 곁으로 돌아가는 카나리아를, 거인은 모랫바람에 눈이 쓰릴 때까지 쳐다보고 있었다.
"알고 있었나..."
거인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라고. 안 될 말이다. 무슨 고생을 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꽤 고민은 되었다. 이대로 마을로 들어가면, 소녀를 죽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망설여졌다. 새처럼 자유롭고, 금빛 모래처럼 아름다운 소녀를 죽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며칠 사이에 꽤나 정이 든 모양이었다. 하기야 유키라는 아름다웠으니까. 그 아름다움에 일일이 매혹당했다간 자신이 자이언트라는 자각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인은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자이하드는 일어섰다. 어깨를 덮고 있던 모래가 우수수 떨어졌다. 몸을 털어내어 남은 모래들을 모조리 사막에 흩어내며, 그는 쿵쿵 발을 굴러 마을로 달려갔다. 그 어깨에, 발레스 전사의 긍지가 한 웅큼은 걸려 있었다.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죽더라도 전쟁터에서 죽으리라. 여자아이 같은 것에 미혹당하지는 않으리라. 그의 무게는 사막에 때 아닌 지진을 일으켰다. 깜짝 놀란 엘프 전사들이 집에서 우르르 뛰쳐나왔다. 비상 경보가 울렸다. 부우- 하고 뿔피리 소리가 가득히 마을을 울린다.
"자이언트다! 자이언트가 쳐들어왔다!"
거인은 개미 떼처럼 몰려 나오는 엘프들을 한 차례 팔로 훑어냈다. 그들은 4m나 되는 거인의 굳센 팔 아래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그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그의 앞을 막아선 전사 엘프들은 자이하드에게 나가떨어지자마자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화살이 수도 없이 그에게 날아왔다. 자이하드는 몰려드는 화살을 쳐내며 땅바닥에 엎드린 엘프들을 발로 짓밟았다. 끔찍한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이 유키라와 같은 미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이하드는 온몸에 화살이 박힌 채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그 엘프들을 쳐다보았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정말 죄책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 엘프들은 개미보다 못한 존재인데, 자꾸만 한 소녀의 그림자가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럴 수록 거인은 자신을 다잡으려 엘프들을 끝없이 밀어내고 짓밟았다.
문득, 저쪽에서 슬픈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소녀 엘프 한 명을 발견했다. 유키라는 네모진 건물의 그림자에 숨어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이하드에게 죽어가는 엘프들을 끔찍한 동정의 눈으로 쳐다보면서. 그리고 살육을 자행하는 그 거인에게도, 무한한 동정을 보내면서.
자이하드는 정신없이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화살을 쳐냈다. 그리고 쿵쾅거리며-아래에 깔려 있는 엘프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사막을 달려 소녀 엘프에게로 달려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꺼질 수 없는 슬픔이, 슬픔이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잔혹한 느낌을 자아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화살 하나가 등허리에 박힌 것 같았다. 그러나 자이하드는 꿈쩍도 하지 않고 유키라를 내려다 보았다. 엘프들이 소란스럽게, 자이언트가 소녀 엘프를 죽이려 한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자이하드가 유키라에게 요구한 것은 죽음 따위가 아니었다.
"아가씨, 노래를 불러 줘요."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많은 화살이 그에게로 달려들고,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어째서 그 작은 소녀의 노랫소리가 듣고 싶었는지……. 가엾게도 소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 슬픈 눈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소녀는 미성을 뱉어냈다. 달겨드는 화살이 자이하드의 등과 팔에 내리꽂혔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말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엘프들의 소란스러움에 묻혀 소녀의 가냘프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거인은 확실하게 듣고 있었다. 그는 이곳 필리아에 온 목적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소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카나리아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자이하드를 향해 날아오던 화살이 빗나가, 노래를 부르는 소녀의 심장으로 내리꽂혔다. 노래를 부르던 유키라는 헉,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자이하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더 이상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자아이는 그대로 죽어버린 듯, 모래에 검붉은 피를 꿀럭꿀럭 토해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거인은 미쳐 버렸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개미처럼 달려드는 엘프들을 제치기 시작했다. 이미 수십 대의 화살이 몸에 꽂혀 있었지만, 거의 갑옷에 막혀 몸으로는 침범하지 않았다. 설령 몸으로 침범했더라도 그는 이미 아픔 따위는 느끼지 않고 있었다.
자이하드는 달렸다. 엘프를 죽이기 위한 몸짓은 아니었다. 그는 엘프들을 수없이 제치며, 사막을 달렸다. 피가 뚝뚝 모래 위로 떨어졌다. 왜인지 몰랐다. 그녀는 엘프다. 소녀 엘프. 다른 엘프보다 조금 더 순수할 뿐인 소녀 엘프였다. 가슴이 저릿해져 왔다. 거인의 그토록 단단하고 다부진 가슴에도, 심장은 뛰고 있었던가- 자이하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눈에 가득히 맺혀 있던 어떤 것이 또르륵 뚝, 굴러 뺨을 훑어 내렸다.
그는 허공을 향해 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미쳐 버릴 것 같은 감정이 뇌를 지배했다. 대체 어째서 울음을 흘리는가, 어째서 가슴이 아픈가. 거인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감정에 땅을 치며 울었다. 자이하드의 괴성이 쩌렁쩌렁 허공을 가득히 울렸다. 그 외침의 끝에서, 그는 유키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한없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어디로 가버렸느냐, 소녀야. 작은 새를 지켜주지 못한 자신이 끝없이 원망스러웠다. 땅을 두들기며, 그는 사막의 모래 위에 이마를 댔다. 모래가 푹 파이며, 그의 땀과 피가 범벅이 된 이마에 들러붙었다.
어디로 가 버렸느냐. 나의 카나리아. 카나리아.
*
자이하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테이블 위에 있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차가운 얼음물 한 컵을 뱃속에 들이붓고, 창밖으로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노래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 소녀 엘프가 자주 불렀던, 동요였다. 사막의 원혼이 어쩌고 하는. 자이하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노래였지만, 애초에 자이언트의 마을에는 가사를 붙일 노래라고 하는 게 거의 없었다. 그들은 자기 기분에 따라 노래할 뿐, 음률만 있지 노랫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해서 그는 귀에 익은 소녀의 노랫말을 머리에 되새기며 노래 연습을 했다. 연습하는 것은 자신의 집 안에서만이었다. 밖에서 그런 엘프의 노래를 불렀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엘프의 노래에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목소리였다. 소녀 엘프의 미성은 절대로 그 목소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피릿! 피릿!
거인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쳐다보았다. 적막한 자신의 집 안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창문으로는 눈 덮인 설원이 보였고, 눈덩이를 가득 짊어진 나무들이 호젓하게 서 있었다. 그 와중에 이상한 소리는 자꾸만 들려왔다. 피릿! 피릿! 그것이 노랫소리 같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자이하드는 더욱 더 자세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창문의 구석에서 가냘프게 노래하고 있는 카나리아를 발견했다. 카나리아는 방 안으로 들어와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카나리아의 노래는 약간 구슬픈 미성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음률. 거인은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필리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석상이라도 된 양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카나리아가 노래를 하며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았다. 자이하드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카나리아는 그 투박한 음색에 맞춰 고운 미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방 안을 날며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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