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어디 먹고 살겠어(I want to go there - Emain Macha)

    그러니까 얘기는 얼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나는 던바튼과 이멘 마하를 번갈아가며 물건을 파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큰 사태가 나서 그 길이 막혀버렸다는 거야. 내 한 몸 지나가는 것도 힘든 일인데 짐까지 지고 있으니 이거 죽겠더구만. 하는 수 없지 뭐. 나만 못 가는 것도 아닌데 어쩌겠어.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게 단순한 사태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길이 막힌 거라는거야. 봉인... 뭐시기로 말이지. 봉인석이라던가? 근처에 가면 이상한 사념 메시지가 뜨는데, 그게 그걸 없애기 위한 무슨 조건 같은 것이라고 하더군. 내 그 얘기 듣고 나서 어이가 없더군. 세상에 바빠 죽겠는데 무슨 장난 같은 짓이야 그게?

    좌우간, 좀 있으니 왕립 마법학회 학자들이 그 앞으로 봉인석의 조사와 제거를 위해 출발했다고 하더군. 듣자하니까 내가 직접 본 게 처음이라서 그렇지, 의외로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대나봐. 내가 또 발이 좀 넓은 상인이다보니 일단 관심을 가지게 되면 정보를 모으는 건 금방인지라, 그거에 대해 좀 알아봤지.
    ...다들 아주 포기하고 살더만? 하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서 봉인석은 학자들 말고는 그리 관심도 없대. 모험가들이나 여행자들은 봉인석을 깨는 일을 자신의 힘과 지혜, 용기를 증명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기고 꽤 대단한 의미를 두는 것 같기도 하지만... 뭐, 우리 같은 민초들에게는 그냥 며칠 공치는 일일 뿐이라구.

    어쨌든 다들 이 문제 때문에 불만이 대단했나봐. 봉인석 때문에 각지의 교통이 두절되는 일이 하두 잦다보니 아예 마법학회에서도 이런 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다고 하더군. 뭐 납득 가는 내용이야.

    그런데... 말이 그렇지, 이 마법학회란 놈들이 사실 봉인석을 직접 깬 실적은 없다더군? 그냥 다들 아는 사념 메시지 내용을 뭔가 대단한 내용이라도 발견한 양 풀어서 설명하고서는 철수한다는거야 글쎄. 이런 세상에. 이래서 대가리에 먹물 든 것들이란... 실생활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이론을 주워섬기는 것으로 만족한다니까. 보나마나 이번에도 전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사념 메시지 내용을 풀어놓고 이번에는 이런 방법으로 깰 수 있다... 라는 식으로 발표만 하겠지. 마법 뒀다 어따 쓰는지 원...

    그래도 마법사란 사람들도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는 인간들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하루 매상이 얼만데 이렇게 죽치고 허송세월만 하고 있나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때쯤 상인 길드를 통해 이런 소문을 들었거든. 왕립 마법학회에서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어떤 봉인석이라도 단번에 부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을 완성했다는 거야. 진작 좀 하지... 며칠 있으면 다시 생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럭저럭 마음이 놓였지.

    뭐, 너무 많이 쉬기도 했고, 봉인석이 부서지는 광경을 보기도 할 겸 해서 마법학회에서 봉인석을 파괴한다고 공표한 날 나도 현장으로 짐을 꾸려 달려갔어. 이멘 마하로 가는 길이 열리면 잽싸게 갈 수 있도록 말이야.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구.

    아침 일찍 그곳에 도착해 보니 가관이었어.
    꽤 고급스러운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이것저것 시약을 뿌리고, 스크롤을 붙이고, 꽤나 번잡하게 굴더군. 자세히 보니까 같은 자리에 계속 붙였다 떼는 사람도 있고, 일 없이 바쁜 것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저런 놈들이 우리 세금을 낭비한다고 생각하니 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뭐 어쩌겠어, 봉인석을 뚫어준다는데. 사실 중요한 건 그거 아니겠어?

    뚫리기 전에 봉인석에 대한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할 겸 손을 살짝 대보니까... 신기하기도 하지! 말로만 듣던 사념 메시지가 정말로 머리에 울려퍼지는 거야!

    [오랜 인생을 겪으며 성장한 사람만이 이 봉인을 깨뜨릴 수 있다.]

    이게 그 조건이란 거로군! 좋아!

    해가 중천에 떠 구경꾼들도 꽤 모이고 준비도 어느 정도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이윽고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남자가 사치스러운 로브를 입고 그 앞에 섰어. 딱 인상을 보니 구석에 처박혀서 마법밖에는 공부 안했을 법한 사람이야. 저 정도라면 오랜 인생을 겪으며 성장한 사람이 맞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직접 깨는 게 아니라, 마법을 사용해서 깰거래. 이 주문을 사용하면 조건을 자동으로 파악해 봉인석을 부서지게 할 수 있다나? 뭐, 앞으로 생기는 봉인석에도 써야 할 방법이니 어떤 쪽이든 봉인석만 부서진다면 크게 문제 없겠지.

    이윽고 마법 시전이 시작되었어.
    그 나이 지긋한 마법학자는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면서 손에서 빛을 내기 시작했어. 굉장하더군! 마법사라는 게 실용적인 직업은 아니지만 적어도 폼은 나는 직업이라는 걸 나는 그 광경을 통해 알게 됐지.

    어찌보면 마법이란 게 차력과도 닮은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했는데 순간 그 마법학자의 주문 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이윽고 그 봉인석 주위를 빛이 몰아치면서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어. 귀가 멍멍할 지경이더군. 나는 매캐한 연기를 손사래를 치며 걷어내고, 눈을 봉인석이 있었던 곳으로 돌렸어.
    드디어 뚫렸구나! 이제 그곳을 통과해 가는 일만 남았다...

    ...라고 생각했는데, 봉인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야! 마법학자들도 놀래서 웅성대고 당황한 표정이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저마다 투덜거리기 시작했어. 아아, 분위기 안 좋았다구.

    마법학자들 몇 명이 봉인석으로 달려가 이것저것 조사를 하더군. 개중에는 발로 봉인석을 차는 놈들도 있었어. 무능한 자식들... 그런데... 조사하던 놈들이 하나같이 봉인석을 쳐 보더니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쪼르르 달려가서 자기들끼리 뭐라고 쥐새끼들처럼 쑤군대는거야.

    슬쩍 옆으로 돌아가서 나도 봉인석에 손을 대 봤지.
    근데... 거기서 나오는 사념 메시지, 이게 아주 걸작이더라구.

    [오랜 인생을 겪으며 성장한 사람만은 이 봉인을 깨뜨릴 수 없다.]

    깨뜨릴 수 없다구? 분명히 깨뜨릴 수 있다였다구! 조건이 반대가 된 건가? 내가 알기로는 봉인의 조건이 바뀐 적은 없다는 걸로 들었는데... 그럼 답은 하나지... 종전의 마법으로 봉인 조건이 바뀐 거야. 봉인석을 깬 게 아니라 봉인 조건을 바꾼 거라구... 어이구 장하다! 그렇게 준비를 요란하게 해서 결국 한 게 이거냐!

    그런데 이 마법학자놈들은 그게 굉장히 기쁜가봐. 자기네들끼리 얼싸안고 아주 난리가 났어. 마치 애초에 조건을 바꾸는 마법을 시도라도 했던 거 같더만. 아까 그 마법을 건 놈이 나와서 이런 이야기 하더군. 마법시전에 사소한 오류가 있어서 비록 봉인석은 파괴되지 않았지만, 지금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으니 모두 축하해 달라고. 개뿔.

    그런데... 마법조건을 바꿔서 조건을 쉽게 만들면 또 의외로 빨리 깰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한 번 더 참아주기로 했지. 마법학자들도 나랑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야. 그래서 또 한 차례 시전 준비를 하더군...

    ...그날 저녁, 난 던바튼으로 기분만 잔뜩 잡쳐 돌아왔어. 그 양아치놈들은 하루 종일 봉인석 조건만 바꾸면서 놀더군. 게다가 더 안좋은 것은 마법을 시전하면 시전할수록, 마법력이 조건에 개입되어 조건이 더 까다로와졌다는 거야.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놈들도 이러다가는 이멘 마하의 봉인석을 영원히 깨지 못하는 조건으로 만들지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던 모양인지, 다음 번에 새 봉인석이 생기면 자기네들이 발견한 방법을 추가로 테스트해보기로 했다나... 결국 마지막으로 바뀐 조건은 이거래.

    [같은 시간에 더 많이 성취한 자가 이 봉인을 깨뜨릴 수 있다.]

    젠장. 내 웃기지도 않아서 정말.
    ...그리고 다음 날엔 언제나처럼 마법학회의 설명이 이어졌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 이 시간을 보람되게 사용해 많은 경험을 쌓고, 이것을 자신의 성장의 기회로 삼는 자만이 봉인석을 깰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아이구 잘났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를 가리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거야.

    그나저나 이멘 마하로 가는 길은 언제쯤 뚫리려나.
    뭐, 내가 직접 깨보고도 싶지만 내가 또 워낙에 바빠서 말이지.
    ...누구 깨볼 사람 없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