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은, 빨갛고 윤기가 나는 열매였다.
쿠르클레의 더운 기후는 선선한 날씨를 좋아하는 나에겐 고역이었다. 습하면 습한대로 더우면 더운대로 늪지대 라던지 사막을 다니는 일이 훨씬 쉬웠다. 습한데다가 덥기까지 한 이 곳은 정말이지 내겐 지옥도의 어드메다. 한참이나 정글의 느낌이 강한 열대의 숲 속을 헤메어 봤지만 코르는 좀처럼 내 눈앞에 나타나주질 않았다.
결국 나는 커다란, 아니 커다랗다는 말로는 부족해서 거대하고 표현하는 게 적합할 듯한 그런 나무의 그늘 속을 골라다니는데 지쳐 그나마 질척한 곳을 피해 포슬포슬한 흙 위에 누워버렸다. 냅다 뻗어버린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쏟아질것만 같은 붉은 열매들이었다. 숨막힐 것 같은 더위도 잠시 잊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열매. 나는 한동안이나 마음속으로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어디 아프세요?"
"아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일으켜 드릴까요?"
그녀는 팔라라보다도 더 화사하고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갈색의 자그마한 손을 내밀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머리 뒤에 배경으로 보석같은 열매들이 빛났다. 찬란하게. 저녁이 되어서야 코르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익숙한 듯 나를 안내해 준 그녀 덕분이었다. 조금 위험하긴 해도 돈을 약간 주고 전사들의 뗏목을 탔더라면 쉽게 올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힘들여 숲 속을 헤멘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그녀를 만났기 때문에. 마을 곳곳에는 반딧불을 담아놓은 그물망들이 나를 환영해주는 듯 했다. 촌장의 집까지 나를 안내해 준 그녀는 내게 인사를 건네고는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시간이 난다면 한번 들려달라며.
새로운 곳에서의 밤은 좀처럼 잠들기가 어렵다. 대륙을 오며가며 잠자리는 수없이도 바뀌어왔건만 늘 제대로 잠이 들지 못해서 수면부족의 푸석한 얼굴로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코르의 기후는 역시나 더운 곳에서는 더더욱 잠들지 못하는 나에게 불면증을 선사했고 나는 촌장이 마련해 준 숙소에서 내내 몸을 뒤척거리다가 결국 동이 터오르기도 전에 숙소를 나와 마을 주변을 잠시 걸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당신도 부지런 하시네요."
그녀가 나를 보며 인사를 했다. 그녀의 집 근처로 무성히 피어 오른 꽃들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반가운 얼굴로 몸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그녀는 한송이의 꽃 같았다.
"리파이 꽃은 해가 뜨기 전에 이슬이 맺혀 있을 때 따는 것이 가장 좋으니까요. 이 곳 코르에서는 이 꽃으로 염료를 만들어 옷을 염색해요. 모두가 잠에 빠져있는 이 평화로운 순간에 이슬이 맺힌 리파이 꽃을 보고 있다보면 가끔 전 제가 꽃의 정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예요."
"꽃의 정령이라..."
"제 말이 너무 길었죠?"
"아니예요.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우니까요."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물든다. 너무 앞서나간 느낌에 고개를 숙여버렸다. 어쩔줄 몰라하며 사과를 하는 내게 다시 웃어주는 아름다운 아가씨. 멈춘듯한 시간 속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코르에 체류한지도 2주가 지났다. 기후조건이야 열악했지만 고대 이리니드의 여러가지 라던지 토속적인 유물들은 뭔가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겐 놓치고 싶지 않은 관심사 였고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를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마을 생활에 꽤 익숙해져 동물을 조련하는 꼬맹이와 그의 절친한 동물친구와도 친해졌다.
"현 씨, 계신가요?"
최근 들어 참지 못할 정도의 더위에 낮시간을 대부분을 거처에서 지내던 나를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 나는 부시시한 머리를 몇번 매만지고 급하게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푸른빛이 도는 옷가지를 든 그녀가 서 있었다.
"더위를 많이 타시는 것 같길래 제가 만들어 본 옷이예요. 변변찮지만 받아주시겠어요? 지금 입고 계시는 옷보다는 시원할거예요."
"아...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그럼 가볼께요."
임무를 완수한 그녀는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있었다. 옷은 내 눈동자 색과 비슷한 예쁜 물색이었고 나는 숙소로 들어가 옷을 입어보았다. 얇고 아삭아삭한 천의 촉감이 좋았다. 몸에 적당히 맞는 옷의 사이즈에 내심 놀라기까지 했다. 사려깊은 그녀. 나도 그녀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면...
"무슨 일이세요? 혹시... 옷이 불편하시다거나 수선할 곳이 있으세요?"
"아뇨. 저기..."
나는 그녀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비싸고 귀한 것을 내밀었다. 언젠가 여행길에 잠시 동행했던 소위 말하는 선수라는 작자가 알려 준 여자들이 좋아하는 선물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준 선물을 두 손으로 받아들더니 자세히 살펴보았다.
"예뻐요."
"선물이예요. 당신의 옷에 대한 보답으로."
그녀의 손가락은 나의 선물을 집어 올려 햇빛에 비추었다. 쏟아지던 빛과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낮은 탄성. 그리고 떨려오던 나의 마음.
"이 것은 무어라 부르죠?"
"루비 예요. 젊은 날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예요. 제겐 소중한 것이라 당신에게 주고 싶었어요. 저,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미안... 해요. 전 이걸 받을 수가 없어요."
"왜, 안되나요?"
늘 아름답게 미소짓던 그녀에게선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그런, 슬픈 표정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파랬고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좋아하는 분이 있어요...'
그랬군요.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누굴까요? 그가 미치도록 부럽네요. 코르를 떠나온 지 겨우 3일이 지났을 뿐인데도 당신의 얼굴이 어른거려요. 내겐 닿을 수 없는 당신인데도.
'루비라는 이 보석은 아름다워요. 그리고 현이 씨도 멋진 분이예요. 하지만 전 같은 빛을 지닌 이 커피열매가 좋아요. 마찬가지로 그 분을 사랑해요. 이 자연 속에서 빚어져 온 열매와 이런 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어요. 그 분을 위해서 더 지혜롭고 더 아름다운 여자이고 싶어요. 미안해요...'
그녀가 준 열매는 붉고 좋은 향이 났지만 또한 그 맛은 시큼했다. 내게 너무나 감미로운 사랑과 희망을 주고 이별도 준 그녀처럼. 그렇게 그녀와 나를 만나게 해주었던 열매. 그것은 커피열매 였다. 그녀가 나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쿠시나는 언제나처럼 새벽녘에 일어나 집 밖으로 나왔다. 이슬을 머금은 리파이 꽃을 따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집을 나서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갈색 크래프트지로 만들어진 작은 종이 봉투 였다. 그 안에는 유백색의 크림과 다갈색의 액체가 든 작고 하얀 유리컵이 들어있었다. 봉투를 열자마자 퍼져나가는 감미로운 향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컵 속의 액체를 조금씩 몸속으로 흘려넣었다.
"달고... 시원해요."
향을 음미하듯 감겨있는 그녀의 눈가에는 작은 물방울이 그렁거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과 입은 여느때처럼 아름답게 웃음짓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너덜너덜한 양피지에는 두어 문장의 글이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 그대의 본능은 매혹,
진한 피부는 실크보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는 키스보다 황홀하다. 악마처럼 매력적이고 지옥처럼 나를 빠져들게 하며 커피처럼 달콤하다.
Barista. 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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