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멘 마하 보초의 밤(Night of Sentry In Emain Macha)

    석양이 지고 팔라라의 모습이 하늘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대도시 이멘 마하가 어둠에 잠길 무렵 해지기 전 이멘 마하 각 출입구의 보초를 섰던 근위병들이 고단한 몸을 이끌고 야간 보초들과 교대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간다. 두개의 달이 새까만 어둠에 잠긴 하늘을 밝히는 밤, 유난히도 달이 밝은 날이다.

    "처음.. 보는군?"

    북문의 야간 보초 한 명이 자신과 마주본 채 서있는 다른 보초에게 말을 건냈다. 교대 후, 풀벌레 소리만이 감돌던 서너시간 동안의 정적을 깬 말이었다. 한 참 동안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사내가 무료해진 모양이었다.

    "이 곳엔 오늘 처음 발령 받았습니다."

    자신에게 말을 건 보초를 몇시간이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보초가 그의 갑작스런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거침 없이 대답했다.

    "그렇군, 이름이 뭐지?"

    말을 붙였던 사내는 자신이 반대편의 보초보다 더 고참임을 확인하고 말을 편하게 놓았다.

    "....."

    맞은 편의 보초가 머뭇거리며 아무런 대답이 없자, 사내는 다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아, 굳이 밝히기 싫다면 밝히지 않아도 상관 없네.. 늘 혼자 서던 보초였는데... 외로움을 한 결 던 것 같아서 반가워 건낸 말이었으니.."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다시 팔짱을 끼고 무료하게 하늘을 바라본다. 맞은 편의 사내는 여전히 그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다시 긴 정적. 둘은, 이따금씩 바람결에 풀이 스치는 소리에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두리번 거릴 뿐이다.

    "당신의 이름은.. 뭐죠?"

    이번엔 이름을 대답하지 않았던 보초가 먼저 말을 건냈다. 그 물음에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리고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더.."

    "원더씨, 재미있는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도통 말이 없던 맞은 편의 보초가 갑작스레 말을 걸기 시작해서 윈더는 고개를 약간 기웃거렸다.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는 녀석하고?"

    원더가 냉소하며 반대편의 보초를 비꼬자 그는 약간의 한숨을 쉬고 고개를 떨궜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듯 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듯 하군.. 이야기라.. 뭐, 나름대로 괜찮겠지.. 야간근무중 처음으로 말상대가 생겼으니.. 그 이야기.. 해보게나."

    원더의 승낙에 반대편의 보초는 기분이 좋아진 듯 환하게 웃었다. 그리곤 원더의 옆으로 다가가 '하아' 하고는 짧은 숨을 들이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더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투구를 벗어버렸다.

    "사실 이 곳 북문은, 그동안 지원자가 없어서 당신 혼자 이 곳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밤마다.. 저기 저쪽 팔라딘 수련장 근처에 있는 코일 던전에서 정령이 흘러나와 북문의 보초를 홀린다는 소문이 돌기 때문이죠."

    원더의 옆에 앉은 사내가 말을 이어나가며 팔라딘 수련장 옆에 있는 코일 던전을 손으로 가르켰다.

    "우습군, 여기서 근무한지 10일이 넘어가는데.. 그런 일은 없었어."

    원더는 근거 없는 헛소문을 비웃으며 이야기 하던 보초를 바라보았다. 보초는 코일 던전을 가리키던 손을 거두고 원더의 비웃음에 답하듯 가볍게 웃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령들은 원래 인간들과 화합하며 살아가던 존재들이었죠..그러나,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에 의해 피오드 숲이나 던전 같은 곳으로 쫓겨나게 되었답니다.. 그런 정령들이 주위의 시선이 사라진 야심한 밤에 코일 던전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북문으로 와, 보초를 서고 있던 인간을 홀리는거죠."

    "그렇군.."

    원더는 짧게 말하고는 힐끔 코일 던전쪽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일까요? 역시 코일의 정령들은 탐욕스런 인간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러는 걸까요?"

    "...."

    원더가 아무런 말이 없자 보초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인간에 대한 증오, 복수심.. 자신들의 땅을 되찾고자 하는 강한 열망.. 의지... 혹은 그들의 고통을 보여주기 위한.. 그런게 아닐까요?"

    보초가 떨리는 목소리로 윈더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원더는 묵묵히 팔짱을 끼고 전방을 주시하다 머리를 살짝 긁더니 말했다.

    "글세.. 난 이런 이야기를 잘 믿지는 않네만..으음....... 외로움.. 그 정령은 외로웠던 것이 아닐까?"

    원더가 뜸을 들이다 말을 마치자 보초는 약간 놀란 듯 윈더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 보았다.

    "..외로움...이라.."

    "그래, 외로움.. 나도 야간 보초를 혼자서 서던터라.. 야심한 밤에 말상대가 없으니 약간은 쓸쓸하더군,..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처다보며 시간을 떼우는 것도 이러다 생긴 버릇이고.. 외로움이란 고통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내기 위해선 마음을 비울 필요가 있었거든.."

    원더는 말하던 도중 장난스레 싱긋 웃더니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보초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원더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그 정령들도, 나와 마찬가지 였을거야.. 물론, 오랜 시간 숲에 갇혀 살며 절망감.. 그리고 인간에 대한 증오 같은 것에 괴로워했겠지.. 하지만 증오와 분노는 금방 사그라드는 법이거든.. 그들은 외로움을 느꼈을거야.. 증오나 분노보다 훨씬 더 강한 마이너스 감정을 말야.."

    원더가 말을 마치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보초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는 듯한 얼굴로 꽤 긴 시간, 평소 원더의 버릇 처럼 하늘을 주시했다. 긴 정적이 흘렀다. 한참 후, 어느새 밤은 지나가고 팔라라가 떠오를 기미를 보였다. 붉은 달의 어스름한 붉은 빛과 파란 달의 묘한 빛이 어우러져 신비감을 주던 밤의 하늘은, 천천히 타오르는 팔라라의 뜨거운 빛에 거두어지고 있었다.

    "결국.. 정령들은 외로워서 인간을 찾게 된 거군요.."

    "글세, 어쩌면.. 아마도 말야.."

    꽤 긴 시간동안의 정적이 깨지고, 저마다의 여러가지 생각을 마친 듯 이야기는 짧게 결론이 났다. 원더가 기분이 좋은 듯 웃자, 이름을 밝히지 않은 보초병 역시 원더를 따라 가벼운 웃음을 취했다. 북문의 성벽 너머로 뜨거운 팔라라의 햇살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해가 뜨는군요.. 이제 곧 주간근무 근위병이 오겠어요."

    보초병이 교대를 위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원더는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벗어두었던 투구를 다시 머리에 썼다. 새벽에 생긴 듯, 투구에 달라붙은 이슬들이 원더의 머리칼을 적셨다.

    "하아- 차갑군.. 시원하기도 하구.. 이렇게 개운한 새벽공기는 오랜만에 느끼는 구만.."

    원더는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켜더니 반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보초에게 말했다.

    "자네 덕분이야. 그동안 혼자하던 보초의 막바지인 이 시간엔.. 떠오르는 팔라라의 멋진 햇살과 이 상쾌한 새벽공기를 전혀 느끼질 못했었어, 단지 고단함에 빨리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었거든.. 이것 역시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사실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였지만, 오늘 같이 기분 좋은 새벽은 처음이군.. 고맙네, 다음 근무때 또 보도록하지..."

    보초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원더가 말을 마칠 때 쯤, 저만치서 주간 근무 보초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원더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북문 입구로 다가오는 보초병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보초 둘과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는 이멘 마하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 위로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한 채..

    "고마워요.. 제 지루한 이야기를 들어줘서."

    보초는 원더가 들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긴 하루가 지났다.

    원더는 여느 때 와는 달리 한결 가벼운 몸짓으로 북문으로 왔다. 그리고는 낮시간 동안 근무를 한 보초와 교대했다. 원더와 교대한 보초들은 몹시 피곤한 듯 빠른 걸음으로 그들의 숙소로 향했다.

    "잠깐만!"

    그들을 멈춰세운건 원더였다.

    "무슨 일인가?"

    보초 둘은 짜증스레 인상을 찌푸리며 뒤돌아 보았다. 그러자 원더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제 나와 같이 근무했던 그 보초는 아직 안온건가?"

    원더는 어제 자신과 이야기를 나눴던 보초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 걱정되어 그들에게 물은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 무슨 소린가? 자넨 혼자서 근무하잖나?"

    보초 한명이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확인했다. 그러자 옆에서 그 종이를 보던 다른 보초가 말을 덧붙였다.

    "새로 배정된 신참도 없는데?"

    "..뭐?"

    원더는 당혹스러움에 그들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자네 요즘 밤근무가 많이 피곤한가 보군.. 왠 꿈 같은 소리인가? 아니면, 설마 '정령에게 홀렸다'라는 거짓말을 할 셈인가?"

    원더와 교대한 보초들은 그렇게 말하고는 마을 안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원더는 조용히 코일 던전을 바라보았다. 왠지 아득한 눈으로..

    '그 다음 부터 코일 던전의 입구엔 매일 누가 남긴건지 모를 책이 한 권씩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책엔 늘 이런 글귀가 써져 있다. '이름 모를 나의 친구에게 외로움을 삭힐 이야기 책 한 권을 남깁니다.'

    이멘 마하의 보초들 사이에선 더 이상 '코일던전의 정령' 소문이 떠돌지 않았다.'